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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온글샘 Dec 13. 2023

그 봄날의 주인공

(해외여행 1년살이 하는 딸을 기다리며 )

   유럽 여행을 감행했다. 변화 없는 일상에 별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여행이라기보다 스페인에 있는 딸이 잘 지내고 있는가. 간절히 보고 싶었기에. 보름 조금 넘는 일정이다. 성격, 취향, 입맛이 똑같은 사람이 없기에, 같이 움직이는 패키지 여행보다는 자유여행을 택했다. 내 생애 자유여행을 현실로 만들어 보기는 처음이다.



   항상 즉흥적인 면이 많은 딸인데, 웬일로 엄마, 아빠를 위한 여행 계획표라고 계속 변경되는 상황들을 보내왔다. 어찌나 꼼꼼히 짰던지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벌써 도착해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 세워진 계획에 나는 이끌려 가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인지 걱정이 덜 되었다. 반면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남편은 며칠째 긴장모드였다. 외국어 공부도 추가하면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여행 당일. 비행기를 타서야 비로소 여행 실감이 났다. 비행기 탑승수속 절차부터 기내식까지, 모든 서비스는 만족스러웠다. 매우 잘한 선택이다. 모두 모국어로 안내해 주는 섬세한 기내서비스였으니 더 좋을 수밖에. 기내식으로 준비된 식사를 잘 대접받는 기분으로 먹었다. 건 하루의 절반이 지나서야 스페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하루가 지난 저녁 시간이었다.



   깜짝 이벤트를 즐겨하던 딸은 공항에서도 어김없었다. 엄마 아빠를 환영하는 반짝반짝 글씨체, 공항 문이 바로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금세 우리가 딸을 찾을 수 있도록. 첫날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푹 잘 걸 생각했다. 빡빡한 일정으로. 하지만 이국의 밤 풍경에 홀려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스페인은 연중 따뜻한 기후로 아름다운 해안과 풍요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인 태양의 나라다. 11월의 바르셀로나의 기온은  영상이었다. 추위에 민감해서 두꺼운 옷과 수면양말이 필수인 내겐 딱 좋은 나라였다. 풍부한 문화, 웅장한 건축물, 일 년 내내 즐길 거리가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론다. 말라가,그라나다 등 많은 곳을 여행하며 도시마다 너무나 다른 분위기로 다채로운 매력을 만끽했다. 저녁에는 마치 우리나라의 포장마차 거리처럼 타파스 바 여러곳이 노천에 간이 매대를 열어 음식을 팔았다.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즐기는 모습이 정겨웠다. 또 맛집이란 맛집은 구석구석 다 찾아다니는 것은 자유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가장 좋았던 도시는 뭐니 뭐니 해도 바르셀로나다. 유독 가우디 건축들은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서 가이드와 함께 한 일정이었다. 정말 볼수록 황홀경이다. 그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특별하다. 해외여행의 끝판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빛으로 가득한 성당은 신비로움을 넘어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말라가 해변가를 셋이서 자전거로 투어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즉흥 계획이었다. 동네에선 자전거를 함께 타자는 남편의 성화에도 꿈쩍 않던 내가 말라가 해변을 자전거를 타고 있다니...나도 놀라울뿐이었다.  물론 완주는 남편과 딸만 했지만. 또 요즘 SNS상에서 핫한 15초 내외의 짧은 동영상을 ‘릴스’라 하는데, 딸은 뜬금없이 우리도 해보자고 제안했다.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똑같은 동작을 남겨 보잔다. 남편은 난감한 표정이다. 과묵한 남편이 과연 사람들이 지나가는 앞에서 익살스런 동작을 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웬일인가. 점점 동작이 과격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누가 딸 바보 아니랄까 봐서.


  몇 날 며칠을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즐기면서 지냈다. 온갖 걱정거리는 잠시 넣어두고. 그런데 여행 중간쯤 지났을까 슬며시 딸이 건네는 말이 심상치 않다. 지금 기거하고 있는 스페인에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단다.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모를 정도로. 그래서 생명의 근원, 대자연을 만든 신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 남미로 떠날 예정이란 선전포고를 날렸다. 거기에서 국제적인 멸종위기종 생물 영상도 유튜브로 담고, 제작할 예정이라고. 너무 주장이 강한 아이라서 막무가내로 말릴 수도 없지 않겠는가.


   문득 어느 책에선가 읽은 ‘행복은 항복’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위해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항복해야만 행복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행복은 항복하고 항복하여, 내 안의 또 다른 나마저도 결국은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이 또한 내 생각과 같아서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행복은 오직 하나,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그날 이후로는 순간순간 여행할 맛이 나지 않고, 먹먹한 가슴앓이를 해야 만 했다. 여행에서의 재미보다는 한국으로 딸과 못 가는 것도 그랬는데, 딸이 이보다 험한 타지에서 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걱정이 더 컸음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귀국하는 길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이러다간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마음도 몰라주며 딸과 헤어져서 슬픈 거냐, 집에 가기 싫은 거냐는 남편의 실없는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가긴 했지만.


   다행히 딸은 며칠 전 에콰도르 갈라파고스에 무사히 도착했단다. 좋은 현지인 만나 잘 정착했다는 희소식과 함께. 멸종위기 동물들과도 교류하고 있으니, 걱정을 말란다.  봉사활동으로 현지인의 집에 머물러 숙식 제공받는 것도,  영어도 맘껏 쓰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가 감사할 일이다. 아! 다이빙을 원없이 한다는것도 ...

그렇다. 딸의 젊음은 최대의 무기다. 용감했다. 딸은 아무리 뜯어내고 뽑아 버려도 어느새 씨앗을 퍼뜨려 여지없이 저절로 꽃을 피우고야 마는 야생초를 닮았다. 어찌 이런 안전 불감증 대담한 아이가, 안전 과민증인 

내 속에서 나왔을까. 계속 의아함이 들 정도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중한 경험일 수 있다. 이젠 딸이 한 말들이 다 내 머릿속에 세뇌되었다. 어느덧 내 머릿속에 먹혀들어 간 듯. 다른 것은 몰라도 여행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엄마인 나는 옆에서 지켜보며 믿고 응원해 줄 뿐이다. 자기 삶은 자기가 개척하여 살아내는 것이니까.



    딸이 타지에서 보고 느낀 짜릿한 경험들이 남들에게 자랑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미칠 정도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속속들이 듣고 보고 맛보길 기대하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어떤 봄날을 상상 속으로 기다린다. 그 겨울, 스페인에서 받은 당황했던 선물도, 이제는 설렘을 즐길 준비된 엄마이니까. 그 봄날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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