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씨앗

by 박경이



이 달만 지나면 올해의 마지막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달로 접어들었다. 최후의 전선처럼. 겨울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귓가에 차가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편으로는 겨울이 마치 묵직한 커튼을 닫아주는 무대 감독처럼, 한 해의 막을 차분히 내려주는 계절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나이와 연도라는 기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삶의 좌표를 나타내는 숫자일 뿐, 마음의 온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내 손에 들려온 내년의 다이어리는 묘하게도 그런 내 생각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다이어리를 열었을 때, 그것은 마치 시간 여행 티켓처럼 느껴졌다. 첫 장에는 ‘2025,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세요’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마치 조명이 켜진 텅 빈 무대에 홀로 선 배우처럼 느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한 해의 주인공으로서, 나는 그 무대를 채울 책임감을 느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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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기니 각 달마다 테마가 있었다. 1월은 새로운 시작의 떨림, 2월은 사랑의 온도, 3월은 새싹처럼 자라나는 희망 등 마치 한 권의 드라마 대본 같았다. 페이지마다 담긴 문구들은 무미건조했던 내 일상에 작은 도전을 던져주었다.


그러다 발견한 코너는 아주 낯익었다. 다이어리의 한 귀퉁이 작은 네모 칸 안에 적힌 ‘감사일기’라는 제목이었다. 그 칸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잠시 멈췄다. 작고 소박한 제목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오래 외면해왔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했으니까. ‘매일 하루를 마무리하며 고마웠던 순간을 적어보세요.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따뜻한 불빛이 되어줄 겁니다.’


그 문구는 마치 잊고 지낸 나의 감각을 깨우는 알람 같았다. 매일 쫓기듯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놓친 고마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찬바람이 스며든 손끝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내 마음에 그 문장은 작은 온기를 불어넣어주기 충분했다.




펜을 들어 감사일기의 첫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한 첫 날. 처음에는 서툴렀다. 오늘 고마운 일이 있었던가. 조금 더 천천히 기억을 되짚자 작고 평범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아침에 들려온 딸의 다정한 안부 인사, 단잠을 깨우지 않고 살며시 출근한 남편, 그리고 햇살 아래 마신 커피 한 잔...


감사일기는 마치 차가운 손끝을 덥혀주는 따뜻한 난로 같았다. 그것은 삶에 작은 불빛을 켜 주기 충분했다. 그 빛은 어두운 구석을 비춰주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감사는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순간들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었다.


다가오는 한 해는 어떤 모습일까. 다이어리 속 감사일기 코너는 마치 아직 채워지지 않은 캔버스 같다. 이 캔버스에 매일 작은 감사의 씨앗을 모으라고, 그렇게 적힌 감사들은 언젠가 한 편의 그림처럼 내 삶을 빛내주겠지.


겨울은 다시 찾아왔지만, 이제 내 마음은 춥지 않다. 감사의 온기로 데워진 내 삶은 마치 겨울을 녹이는 햇살처럼 따뜻하다. 내년의 마지막 달이 오면, 이 다이어리는 나의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한 편의 이야기로 빛나 있을 것이다. 겨울은 마침표가 아니라, 내 삶의 감사로 시작된 쉼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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