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에 반한 보리수
초여름의 바람이 옷깃을 살짝 스치던 날.
글쓰기 문우들과 함께 계획에도 없던 보리수 따기를 나섰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볍게 걷고 활짝 웃으며 하루를 흘려보내던
그 시간 위에서 우리는 뜻밖의 만남 앞에 멈춰 섰다.
수줍게 붉은빛을 머금은 채 우리를 바라보던 보리수나무.
그 순간, 마음이 먼저 익어버렸다.
그리고는 ...
마치 우리를 오래도록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무는 풍성한 가지 사이로 붉고
투명한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오래 기다린 마음처럼,
가지마다 익어가는 보리수는 햇살보다 먼저 성숙해 있었다.
보리수나무 앞에 서자 그 풍경은 단순히 열매를 따는 행위를 넘어선
‘마음의 수확’처럼 느껴졌다.
나무는 마치 오랜 세월 자신의 속살을 다 내어준 듯,
주홍빛 열매를 가지마다 가득 품고 있었다.
햇살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알알이 영글어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린 보리수들은 붉은 숨결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 것을 먼저 손에 쥐어야 할지 모를 만큼,
그 풍요는 오히려 머뭇거림을 부르게 했다.
이 많고도 많은 열매들 사이에서 한 알을 고른다는 건
마치 잊고 지낸 기억들 중 하나를 꺼내어
쓰다듬는 일처럼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빙 둘러섰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 꿈을 보았네..."
각자의 추억을 닮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열매를 따고 웃고 또 나누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보리수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만히 장단을 맞췄다.
그 순간, 우리는 계절의 중심에서 시를 쓰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 “이건 마치 영화 속 장면 같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글 한 편 나오겠는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웃음이 퍼지며,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우리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순간의 공기마저도 문장이 되는 듯했다.
한 광주리 가득 보리수를 담아 돌아오는 길,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각자의 마음에 작은 붉은 점 하나로 찍혀
오래도록 남으리라는 것을.
집에 도착해 보리수를 설탕에 재웠다.
설탕 사이사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보리수들은
마치 속삭이듯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쌓이면, 그 안의 은근한 신맛은 사라지고,
깊은 단맛이 배어들 것이다. 익어가는 건 열매만이 아니다.
기다림도, 기억도, 그리고 마음도 함께 숙성되어 간다.
보리수를 보고, 따고, 재우는 동안 문득 깨달았다.
인생도 이와 닮아 있다는 것을.
제때 익어야 하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 때가 되면 마음을 내어줘야 한다.
조용히 누군가의 온기를 받아들여야 하듯이.
그리고 스스로를 익혀야 한다. 그래야만 단맛이 된다.
누군가에게 건네질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내면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