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얼굴, 말

말의 무게를 배운 하루

by 박경이


스스로를 ‘늘 말을 곱게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상대를 배려하고, 예쁜 표현을 고르며, 불필요한 상처는 주지 않는다고 믿어왔기에.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믿음은 착각이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말이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빛깔로 번져가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오랜 세월을 건너 만난 자리였지만, 우리는 금세 예전으로 돌아간 듯 시절을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대학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그 편안함 속에서 나는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기억조차 희미할 만큼 사소한 농담이었지만, 그것은 동창의 마음에 작은 파편처럼 박혀버렸다.


그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미묘한 기류는 숨길 수 없었다.

지금껏 늘 말다툼의 중재자였지, 직접 말다툼의 장본인이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처음 겪는 상황이었기에 나 또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 말이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사소한 농담이었지만, 듣는 이에게는 오래된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고운 말을 한다’는 자부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말의 향기에만 취해 있었던 건 아닐까.

내 말이 예쁘다고 스스로 믿는 것과, 그 말이 상대의 마음에 진짜 따뜻하게 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고운 꽃이라 해도 향기가 지나치게 짙으면 머리가 아픈 이도 있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는 대개 큰 사건에서 오지 않는다.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한마디, 무심한 시선, 지나가는 농담 속에 숨어 있다.

그 상처는 티 나지 않게 스며들어 마음 한구석을 오래도록 시리게 한다.

내가 그날 했던 말도 바로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듣는 이는 웃을 수 없었던 말이었다.

말은 칼과 같다. 칼은 요리를 할 때는 훌륭한 도구가 되지만, 휘두르면 흉기가 된다.

말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덮어주는 담요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예리한 칼날이 되어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의도로 말했느냐가 아니라, 상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마디 말을 주고받는다.그 모든 말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작은 씨앗처럼 남는다.

어떤 씨앗은 시간이 지나 꽃이 되고 향기가 되지만, 어떤 씨앗은 가시덤불이 되어 마음을 찌른다.

그렇기에 말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내가 곱다고 믿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기에 편안하고 힘이 되는 말이

진짜 고운 말이다.

고운 말은 입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그 마음이 사랑과 배려로 가득 차 있을 때, 비로소 말은 온전히 고운 옷을 입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는 고운 말을 쓴다’고 자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오늘 나의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환하게 했는지, 아니면 무겁게 했는지를 자문하려 한다.

그리고 말의 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날 동창에게 던진 말은 내게 귀한 가르침이 되었다.말은 흘려보내는 바람 같지만, 사실은 마음에 남는 흔적이라는 것.

말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라는 것을.

그 얼굴이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보다 감싸 안아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