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인사
기나긴 여름은 끝내 지나갔다. 그렇게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차츰 뒷걸음질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추분을 지나며 낮과 밤의 길이가 균형을 맞추듯, 내 마음도 조금은 평형을 되찾아 간다. 여름의 열기는 아직 잔향처럼 남아 있지만, 그 속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묻어나는 걸 보면 계절은 어느새 가을로 넘어온 것이 분명하다.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어느 한낮, 창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쉼 없이 쏟아졌다. 귀를 가득 메우는 울음은 오히려 정적처럼 느껴져, 세상 모든 소리가 매미에게 자리를 내준 듯했다. 그 순간의 나는, 뜨거운 공기에 갇힌 작은 존재가 된 듯 숨조차 얕아졌다. 여름은 그렇게 소음조차 고요로 바꾸어 놓는 역설의 계절이었다.
또 어느 날은 갑작스러운 폭우에 우산도 없이 뛰어가야 했다. 빗방울은 옷을 단숨에 적셨고, 발밑의 아스팔트에서는 김이 피어오르며 묘한 냄새를 뿜었다. 그 냄새는 뜨거웠던 땅과 시원한 빗물이 부딪혀 내는 여름의 언어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더위와 시원함이 뒤엉킨 계절의 진짜 얼굴을 본 듯했다. 여름은 끝까지 나를 지치게 하면서도 동시에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계절은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는다. 더위에 허덕이던 나를 위로하듯, 가을은 문득 내 곁에 와서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저녁 하늘에 붉게 물드는 노을빛이, 마치 긴 여름을 견딘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같다.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갈잎 냄새는 “수고했어”라는 인사를 대신 전한다. 그래서일까, 가을이 다가오면 내 마음은 자연스레 느긋해지고, 그리움과 여유가 뒤섞인 색조로 물든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 곡식이 여물고 열매가 무르익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성숙해지는 계절이다. 나는 이 계절 앞에서 늘 작아지곤 한다. 흔들리는 갈대 한 포기에도, 나를 둘러싼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비친다. 그래서 가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 나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다.
시월이 주는 인사는 분명하다. 더위에 지쳐 있던 내 몸과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게 하고, 한 해의 끝자락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묻는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조용히 속삭인다. 이번 가을에는 성급히 달려가기보다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 지나온 날들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가을은 늘 내게 새로운 전진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라야 한다. 전진한다는 것이 단순히 멀리 나아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테니까. 때로는 멈추어 서서 내 그림자를 바라보고,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진’일지도 모른다.
가을 하늘은 높고 투명하다. 그 아래 서 있는 나는, 그 하늘처럼 맑아지고 싶다.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흘린 땀방울이 내 마음을 단련시켰듯, 이제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나의 사색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가을이 건네는 인사를 정성스레 받아 적는다. 그것은 단순한 계절의 선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세우게 하는 귀한 깨달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