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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슬픈 사람이 되지 않기를2

엄마의 노력2

by 해이나

슬프고 울고 상처받고 괴로웠던 기억이 인생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족함과 어려움을 느끼고 한계를 느꼈던 모든 순간들이 더 강한 나를 만들었음을 안다. 실수가 잦은 나를 알기에 몇번이고 확인하는 꼼꼼함을 기르려고 노력했고, 나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을 항상 보았기에 두세배의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갖춰진 금수저의 인생을 부러워한 적이 없으며, 자녀 양육의 방향 또한 고난 하나 없는 꽃길만 걷는 온실속의 화초로 키우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진 풍파에도 살아남는 강한 잡초처럼 키우고 싶었다.


다만 부모의 사랑만큼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 아이로, 인터넷에 매몰되지 않고 책과 운동과 예술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돈을 아끼는 생활 습관은 중요하나 돈에 매여서 하고 싶은 것을 시도도 못해보는 사람이 아닌, 한번쯤은 골고루 경험해보고 스스로 가치판단을 내리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삶의 기회와 밝은 면을 바라보며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 도전하고 개척하는 생명력이 충만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랬다.


비록 나는 가지지 못했지만, 자녀만큼은 행복한 기억과 삶의 충만함을 느끼며 생에 감사하고 도전을 즐거워하는 행복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랬다.



< 회색빛 기억들>


4. 엄마는 초등교사이셨다. 딸 둘을 키우기 위해 우리보다 더 가난한 시골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데려오셔서 언니와 나를 돌보게 하셨다. 퇴근하고 집에 와 보면 딸들 먹이라고 둔 분유를 소녀가 다 먹어버리기도 했고, 어느 날은 자기 집으로 도망가버리고 없기도 했다. 그러면 소녀의 집으로 찾아가서 다시 달래서 데려오곤 했다고 하신다.

소녀가 자꾸 도망을 가서 더이상은 버티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시고는 교사를 그만두시고 퇴직금에 대출을 합하여 작은 집을 마련하셨다. 양가 집의 어떤 도움도 없이 가난하게 사시던 중 마련한 이 집은, 20여년 후 재개발로 철거가 되기까지 엄마가 쓸고 닦고 고치고 광내던 소중한 삶의 안식처가 되었다.


전업 주부가 되신 엄마는 호탕한 성격과 입담과 재치로 동네이웃과 교회 집사님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셨다. 젊었을 때 칠면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뭇 남성의 마음을 설레게 한 여러 일화를 들려주시며 패션과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결혼 후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칠면조 엄마를 콩나물값 100원을 깎아 내리는 억척 아줌마로 바꾸어 놓았고, 시댁의 모진 풍파와 남의 편인 아빠 사이에서도 악착같이 모으고 아끼셨다. 택시타고 갈 거리는 버스를 탔고, 버스 탈 거리는 걸어다니며 차비도 아끼셨다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던 아빠가 오토바이를 거쳐 자동차를 운전하며 출퇴근 할 수 있도록 살림을 키우셨다.


나는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연필이 몽당 연필이 되고 볼펜 깍지에 넣어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면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새 연필 한 자루를 타서 다시 몽당이가 될 때까지 아껴서 쓰곤 했었다. 태권도 학원을 다니고 싶어서 졸랐으나 다니지 못했고, 집에 있던 50여권의 책을 외울 정도로 무한반복해서 읽은 후에는 책을 사달라고 졸랐으나 사주지 않으셨다.(당시 우리집 주변이나 학교에는 도서관이 전무했다.) 옷은 사촌 언니들이 물려 준 옷을 친언니가 입고, 그 후에 내가 입었다. 친구들이 50원, 100원을 넣고 돌리는 뽑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해보지 못했고, 너무 하고 싶어서 엄마 지갑에서 100원을 훔쳐서 뽑기를 했다가 눈치 백단인 엄마에게 걸릴 뻔 한 후로는 무서워서 돈이 있어도 안 했다. 오락실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알았고 문방구 앞 50원을 넣고 하는 오락기기를 미친듯이 두들기는 친구들이 부럽지는 않지만 딴 세상 사람 같아 신기했다.


초등학교 3학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자연농원(^^ 에버랜드)에 간 적이 있는데,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돈 걱정으로 너무 즐거운데도 즐길 수가 없었다. 엄마가 점심으로 사 주신 우동을 먹으며 '이렇게 돈을 막 쓰다니. 우리 집 망하는게 아닐까.' 걱정을 했다. (나만 그랬다. 언니는 신나게 놀았음. ㅎㅎ)


학교 소풍 때는 엄마가 쥐어주신 천원 짜리 지폐를 꼭 쥐고 갔다가 다시 꼭 쥐고 왔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 지 모르는데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소풍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주저없이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뽑기도하고 달고나와 솜사탕을 사먹는 친구들의 여유 혹은 철없음이 부럽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영어과외를 받고 싶어서(한달에 10만원) 엄마를 졸랐는데 안된다고 하셔서 삼일을 울었다.


억척스럽게 가난한 집을 일으켜 세운 전업주부 엄마의 노력을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한 서러움, 책에 대한 간절함, 돈을 쓰지 못하는 강박은 평생의 한이 되어 가슴에 맺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녀에게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주말에는 미술관, 과학관, 박물관으로 체험활동을 다녔다. 과한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배움이 즐거운 체험위주의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어릴 때에는 음악, 미술, 체육 등의 예체능 위주로 활동을 했고, 초등 고학년 부터는 어학원과 수학학원도 보냈다. 유명한 전집을 집에 구비해서 수시로 함께 읽고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고 도서관 행사에 참여했다. 용돈은 따로 주지 않았지만 자녀의 통장을 만들어 명절에 받는 용돈을 저금하도록 했고 용돈의 일부로 주식계좌를 만들어 ETF를 모아놓았다.


직장에서 불안 및 공황증세가 시작되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다 내가 휴직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휴직을 하게 되면 자녀들을 원하는 만큼 가르칠 수가 없었다. 배움의 결핍에 한이 맺혀있는 나에게는 건강을 챙기기 위해 휴직을 하는 것보다 자녀의 체험비, 학원비를 버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다소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직장을 다녔다.


다행히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극성맞은 엄마의 치맛바람이 아닌 즐겁고 신나는 체험의 여정으로 가득하다. 앨범을 보며 종종 말한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어. 알고 있지? 너희들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많이 경험하게 한거야.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한 아이도 많지 않을걸? 그러니까 이제 너희의 앞길은 너희가 잘 선택해서 가자."

이렇게 길게 말하는데 딸의 대답은 참 짧다. "넹. 고마워요."

그래 사랑하니까 봐준다.



5. 살림을 알뜰하게 참 잘하시던 엄마이지만 종종 말씀하셨다.

"날마다 밥하는 거 정말 지겹다. 누가 밥 좀 해주면 좋겠다."


아빠의 식성은 엄마와 매우 달랐다. 엄마는 해산물을 좋아하시는데, 아빠는 국물에 멸치 냄새만 나도 드시지 않았다. 오징어, 멍게, 꽃게 등을 좋아하시는 엄마는, 아빠 위주의 요리를 하셨기에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지 못했고 까다로운 남편의 입맛에 대해 한맺힌 뒷담화를 하곤 하셨다. 아빠는 전기밥솥으로 하는 밥을 싫어하셔서 날마다 냄비밥을 하셔야 했고 후식으로 누룽지도 드셔야 했다. 직장에서 회식이 있는 날에도, 일요일 주일 예배 후 교회에서 점심 밥이 나오는 날에도, 굳이 집에 와서 밥을 차리라 하셨다. 엄마가 '밖에서 먹을 수 있는데 왜 집에서 먹느냐'고 말을 하기라도 하면, 상이 엎어지거나 물건이 날라가서 박살이 나곤 했다. 엄마가 수술을 받고 아파서 누워있어도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해도, 아빠는 밥을 차리라고 하셨고 엄마는 이를 전업 주부인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면서도 평생을 지겨워하셨다.(지금도 지겨워하신다.)

"아이고, 이 지겨운 밥. 죽어야 안먹지."


나는 엄마가 힘들어 하는 것도, 이 말을 듣는 것도 싫었다. 찐고구마나 찐감자로 끼니를 대신하곤 했고 엄마에게 배불러서 밥 안먹어도 된다는 말을 자주 하며, 아빠가 없을 때 만이라도 엄마를 요리지옥에서 해방시켜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요리하기 싫다, 밥하기 싫다, 지겹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비록 요리를 잘 하지도 않고, 미식가도 아니고, 맛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유투브를 검색하며 다양한 아침밥을 차리고 반찬이 많지는 않지만 가족이 따뜻한 밥을 먹도록 노력했다. 맛있는지 물어보고 간이 안맞거나 의도했던 맛이 아니면 다음에 더 맛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딸들은 아빠를 닮아 나보다 더 미식가이지만, 주위 친구들 중 아침밥을 안먹고 오거나 컵라면을 먹고오는 친구들이 꽤 있어서 이를 고마워하곤 한다.

"엄마, 내가 매일 아침밥 먹고 학교 온다고 그러면 친구들이 다 놀래."


딸들이 어릴 때, 주말에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나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자기에 더 피곤할 것이 분명한 남편은 내가 못일어나는 것을 보면 조용히 나가서 김밥과 어묵탕, 빵을 사오곤 했다. 그리고는 아빠가 정말 맛있는 김밥과 갓나온 빵을 사왔다면서 얼른 일어나 맛을 보자고 부산을 떨며 즐겁게 딸들을 깨웠다.

왜 아침밥을 안차리냐, 주말이라고 게으름 피우냐, 내가 너보다 더 피곤하다 같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었다. 그것이 항상 고마웠다.


그래서 평일에는 더 일찍이 일어나 따뜻한 아침밥을 차렸다. 맛있는 음식냄새를 맡으며 아이들이 일어나도록, 수다를 떨며 등교를 준비하는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 되도록, 함께 밥먹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를, 요리와 음식에 대한 밝은 기억이 쌓이기를 소망했다.


6. 고등시절, 성적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심했다. 날밤을 새며 공부하고 싶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밤늦게까지 공부한 날은 학교에서 자주 졸았다. 그럼에도 이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꿈은 성적에 대한 압박과 간절함으로 이어졌고, 밤에 늦게 까지 공부를 하고 다음날 학교에서 꾸벅꾸벅 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더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에 밤에 편히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조금만 자려고 책상에 엎어져서 자거나, 화장실 가고 싶어서 일어나는 효과를 기대하며 물을 5-6컵씩 마시고 잠을 자곤 했다. 엄마한테 깨워달라고 부탁한 시각에 일어나지 못하면 아침에 미친듯이 화를 내고 늦었다며 아침밥도 안먹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참으로 어리석게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 자고, 잘 먹고, 운동도 하면서 건강하고 지혜롭게 공부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집을 너무나도 떠나고 싶어서, 능력있는 자립적 여성이 되어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커서, 나를 무시하는 남자와 돈때문에 이혼도 못하는 그런 여자가 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커서, 마구잡이로 주먹구구로 닥치는대로 공부를 했다.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배에서 꾸르륵 거리는 소리가 온 교실에 들릴 정도록 크게, 자주 나기 시작했다. 조용한 수업시간과 자습시간에 꾸르륵 소리가 너무 커서 창피하고 민망해서 이것 저것 다 해봤는데 우유를 마시면 소리가 멈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날마다 집에서 우유를 두 개씩 가져와서 꾸르륵 소리가 날때마다 한 두 모금씩 마시곤 했다.

없던 비염이 생기더니 점점 심해졌다. 한여름에도 하루종일 콧물이 흘렀고, 시원하게 코를 흥 풀고 싶었지만 수업시간에 친구들 눈치가 보여 콧물을 닦아 내기만 했다. 날마다 책상 서랍에는 콧물을 닦아낸 휴지가 가득했고, 하루 수업이 끝날 때 서랍의 휴지을 가득 껴안고 교실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어떤 아이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더럽다고 말했다.

생리를 보름 간격으로 하기 시작했다. 늘 몸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빈혈과 어리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변이 자주 마려워서 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을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쉬는 시간 뿐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가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 살이 찌기 시작했다. 교복 치마가 허리에 꽉끼어서 불편하고 숨쉬기 어렵게 느껴져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체육복을 입고 다니고 싶었지만, 교복치마가 아닌 체육복을 입고 다니다 걸리면 혼이 나던 시절이었다.


병원에 갔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셨다. 비염은 수능을 보고 난 후에 수술을 하자고 하셨고 산부인과에서는 날마다 먹는 호르몬조절제를 주셨는데 속이 거북하고 울렁거리는 부작용이 있었다. 한약방에 갔는데 한의사선생님은 내 관상을 보시더니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 쯧쯧쯧' 말씀하시고는, 지어주신 한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나는 필통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말씀을 붙여놓고 예수님이 나에게 쉼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살려주시기를, 제발 살려주시기를. 대학만 가면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닐테니 그때까지만 좀 봐주시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신앙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하루종일 꼬르륵 소리와 콧물 닦아내기와 몸에서 날지도 모르는 냄새와 수업시간에도 화장실을 가는 창피함을 신경쓰다보니 더 이상 집중이 안되어 공부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능 보기 한달 전쯤 부터는 공부가 불가능해서 아는 것만 틀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그동안 풀었던 문제집을 꺼내어 오답정리만 계속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가, 쉬는시간 교실 창문으로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수능일이 빨리 오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자녀들이 공부를 해도 항상 운동하고 밤에 잠을 잘 자도록 했다. 공부법에 대해서 책을 읽고 영상도 찾아서 보고 주위의 조언도 들으며, 효과적이고 건강한 학습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했다. 연고티비, 미미미누, 샤스튜디오, 전과자 등 여러 영상을 함께 보며 공부에 성공한 선배들의 조언와 비법을 알아보았다. 입시전문가들과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는 학종의 정보들을 모으며 딸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면서 대학을 가기를 바랬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학습법은 가르쳐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내적 동기나 말하지 않는 스트레스는 도와줄 수가 없었다. 결국은 본인이 헤쳐나가고 이겨나가야 하는 길이다.


둘째는 교우관계에 어려움과 건강 문제로 스트레스가 심화되어 우울증이 생겼고 등교거부에 이어 가족과의 관계까지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둘째의 스트레스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겪었던 시절이니 너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도 나처럼 조금만 더 버티고 대학만 가면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를 기준으로 생각한 판단이 항상 옳을 수 없다. 나는 완벽하게 틀렸고 둘째의 상태는 나보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어둡고 절망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엄친딸이자 모범생이자 칭찬만 받던,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럽기만 했던 우수생 딸의 몰락은 나의 정신세계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재발한 나의 우울증은 내 교만한 판단과 가치관의 결과이지 딸의 잘못이 아니다. 힘들었지만 모든 가치관과 기준을 내려놓고 둘째를 살리기위해 사고를 재정비해야 한다.


살아만 있으면 되지. 그러다보면 밥을 맛있게 먹고 웃는 때가 오겠지.

먹고 싶은 것도 생기고 농담을 들으면서 웃기도 하다 보면,

그러다보면 가고 싶은 곳도 생기고, 하고 싶은 일도 생기겠지.

그러면 다시 일어나서 뭔가를 할 수 있겠지

인생 뭐 있나. 오늘을 살아내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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