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노력1
나의 우울은 언제부터 였을까?
글쎄.
급격한 불안, 공황증세로 우울증이라고 진단 받은 것은 직장에서 충격을 받고 난 후 40대의 일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삶이 힘들고 버거웠던 기억들이 있다.
나의 우울이 유전적 요인인지, 환경적 요인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겪은 슬픈 기억을 자녀에게만큼은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둘째의 우울을 보며 나의 노력이 늘 옳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의 최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 인정하게 된다.
<우울의 기억들>
1. 미취학 시절, 혼자서 책을 계속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글을 읽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었다. 어렴풋하지만 책의 그림을 뚫어지게 보며 이야기를 상상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글자를 읽었고, 그림으로 상상했던 이야기가 글자로는 전혀 다른 줄거리라는 것에 감동어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많은 독서의 부작용으로 책 속의 훌륭한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며 내가 성품이 온유하거나 가치관이 분명하거나 불의에 맞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데렐라처럼 가족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는 사람이 아니었고, 빨간 머리 앤처럼 친구 한 명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괴팍한 할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고운 심성이 없었다.
언니와 나 중 청소를 더 깨끗이 한 사람에게 크레파스 32색을 주겠다는 엄마의 말씀에, 아무리 열심히 청소해도 언니를 이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청소를 아예 하지 않고 크레파스를 내놓으라며 떼를 부리는 아이었고, 거짓말로 가족을 이간질 하는 할머니를 정말 미워하던 손녀였고, 친구와 놀이로 하던 역할극에서 피해아동 역할을 하다가 피해 아동 역할의 찌질함에 화가나서 놀이를 못하겠다면서 뛰쳐 나간 아이었다.
이런 나의 착하지 못함에 깊은 통탄을 준 것은, 누가보면 참으로 웃기다고 할만한, 5-6살 즈음 한밤중에 들린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밤중에 울리는 고양이의 구슬픈 울음 소리를 듣자 갑자기 추운 겨울날 갈 곳없을 고양이의 가여운 처지가 너무나도 슬퍼 엄마에게 저 울고 있는 고양이를 데려와서 키우자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저 고양이는 도둑고양이여서 길들일 수 없고, 먹을 것을 주어도 도망가는 동물이며, 우리집은 가난하여서 저 고양이를 딱하게 여길 처지가 아니라고 하셨다.
나는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되게 굴었던 것, 짜증 냈던 것, 착하게 살지 못한 것 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저 가여운 고양이를 살려주세요. 고양이를 살려주시면 정말 착한 아이가 되겠습니다.' 기도했다. 밤이 새도록 울면서 기도했고, 이것이 나의 첫 회개기도였다.
이 뜬금없는 고양이 사건 이후로 내가 착해졌을까? 나는 여전히 못된 아이었다. 이기적이어서 친구들의 아픔보다 나의 안위가 더 중요했고, 친구들 부모님의 이혼보다 내 성적이 떨어진게 더 가슴아팠던 아이였다. 나는 늘 내가 못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세계명작에 나오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자주인공 같은 곱고 선한 성품이 아닐까. 역경을 이겨내고 도전하는 강하고 굳센 성품이 아닐까.
책 속의 주인공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어리석게 여김이 나를 존중하지 못하고 가치롭게 여기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가끔 나를 가치롭게 여기며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반에서 니가 제일 예쁜 것 같아.'
'와. 보조개도 들어가니?'
'넌 피아노를 정말 잘치는 구나.'
'넌 부모님도 번듯한 직업이 있고 공부도 잘하니 좋겠다.'
'뭘해도 똑부러지는 구나. 어떻게 이 많은 걸 다 해내지?'
그런데 그 모든 칭찬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을 들으면 호흡이 가빠지고 어쩔 줄 모르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가쁜 숨을 내쉬다가 콧물을 내뿜은 적도 있었다. 내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이야기들, 내 본성을 알며 손가락질하며 욕할 사람들.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녀에게>
잘하는 것들을 자주 이야기하고 칭찬해주려고 노력했다. 컵에 물이 반만 차있는 것은 나와 너가 같겠으나, 늘 반밖에 없다고 여긴 나의 어리석음이 아이들에게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랬다. 너에게 있는 물 반절이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하지만 둘째는 유전인지 환경인지 모르겠으나, 나와 같이 스스로를 가치롭게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둘째의 자아비판을 나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 너만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키웠으나 너또한 그러함을 볼 때에 나의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올라오는 쓰디쓴 눈물을 꾹꾹 눌러 내리며 기도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 잠깐 다른 이야기- 도둑 고양이 그 이후>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엄마가 갑자기 지하실에 당분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왜요?"
"도둑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어. 도둑고양이가 집에 새끼를 낳으면 그 집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어. 새끼를 잘 살피도록 당분간 지하실에 들어가지 마."
엄마는 기분이 좋아보이셨고, 짠돌이 엄마가 왠일로 그릇에 우유를 담아 지하실 입구 앞에 놓아주시기도 했다. 얼마 뒤 그 고양이는 새끼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이 고양이가 어릴 적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그 고양이 일거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고양이를 추운 겨울에 살려주시고, 다 커서 이제 우리 집에서 새끼를 낳게 해주신 거라고.
여전히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어릴 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떳떳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기쁨이 스며들었다.
2. 우리집은 선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현금'이었다. 가장 싫어하는선물은 '꽃'. 먹지도 못하고, 일주일 지나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에 돈을 쓰다니, 참으로 어리석다 여겼다. 돈 많은 부자들이나 주고받는 허례허식이었다.(대학생때 과외를 했던 부자집의 사모님이 꽃집을 하셨는데, 생활용품이나 먹는 것을 선물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며 문화충격을 크게 받았다.) 친구들이 가끔 나에게 주는 학용품 선물은 잘 모아놓았다가 다른 친구들의 생일 되면 그대로 선물해 주었고 명절에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은 잘 모아서 부모님 생신때 그대로 드렸다. 케잌도 사느니 돈으로 주고 받았고, 그마저도 안할 때도 있었다.
고등학생 어느 생일날, 아무도 나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실은 대학생 때도, 그 이후에도 자주 그러했다.
'생일 따위를 누가 챙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날. 축하를 받는다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쑥쓰럽게만 하지. 나는 생일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런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 생각했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부던히도 노력했다.
생일은 부담스러운 날. 부담스러운 축하를 받고, 그러면 나도 없는 돈 아껴서 그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주어야하므로 서로 간에 괴로운 날. 그냥 안 축하받고 안 축하하고 싶은 날.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생일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생일이 되면 혹시나 누가 기억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누군가 나의 태어남을 축하해주지 않을까. 세뇌가 완료되지 않은 2% 마음 한 구석이 슬펐다.
<그래서 나는 자녀의>
생일을 열심히 챙겼다. 너의 탄생을 엄마 아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너를 키운 것이 엄마가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행복한 일이었음을 자주 말해주었다. 생일 한 달 전부터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남편은 맛있다고 소문난 케잌 전문점을 알아와 예약 주문을 하고, 편지를 쓰고, 선물 찾기 이벤트를 열었다. 없는 요리 솜씨에 더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불고기와 계란찜, 여러 반찬을 올렸다. 가족과 한 번, 이모집과 한 번, 친구들과 한 번, 생일 파티는 최소 세번 이상이었다.
또한 지금도 가성비가 없다 여겨 스스로에게는 절대로 선물하지 않는 꽃선물을 자녀에게 만큼은 아낌없이 했다.
"너를 닮은 해바라기 꽃다발이야. 고개를 들어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열정이 꼭 너를 보는 것 같아."
"어디에서나 통통 튀는 밝고 환한 분홍 장미같은 우리 딸, 너의 재치와 밝음을 사랑하고 응원한단다."
3. 아빠는 2남 4녀 중 장남이셨다. 조상이 양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몇대 독자나 종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남으로서 아들을 낳아야할 것 같은 부담을 가지셨다. 그런데 내리 딸만 둘을 낳으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 속에 밥한공기를 양껏 먹지 못해 한이 되신 아빠는, 딸 둘을 낳고는 아들이 없지만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결심하셨다.
엄마는 가끔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들이 아닌 걸 알았으면 안 낳았을 거야."
첫째로 딸을 낳고 내심 둘째는 아들이기를 바라던 어머니는 산부인과 의사선생님께서 "심장소리를 들어보니 아들인데요!"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내가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낳았다고 하신다. 당시 초음파가 없던 시절이어서 성별을 구별하는 여러 방법들은 그리 과학적이지 않았다.
엄마는 웃으면서 너의 심장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당연히 아들인줄 알고 낳았다고 하신다. 아마 아들이 아닌걸 알았으면 안낳을 것이라고.
부모님이 안계시던 날, 집의 이구석 저구석을 헤집고 다니다가 오래된 앨범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남기신 편지를 보게 되었다. 그 편지에는 '둘째가 딸이라고 섭섭해하지 말고 잘 키워라.'는 당부가 들어있었다. 편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 돌아가셔서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종종 앨범을 펼쳐서 그 편지를 반복해서 읽곤했다. 하지만 반면, '아빠가 내가 딸이라고 섭섭해하셨구나'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를 섭섭하게 만든 존재, 오해로 살아남은 생명, 가치없는 인생. 그게 나구나.
<그래서 나는 자녀에게>
너를 가져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자주 이야기 하였다. 임신중 유산기가 있어 병원에 입원해서 꼼짝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힘들었지만, 너를 만난 날을 고대하며 만들었던 십자수 턱받이를 보여주었다. 너를 가지고 꾸었던 아름다운 원피스 태몽과 할머니가 꾸었던 온마당에 가득 널린 초록 고추의 태몽을 이야기하고, 너가 아팠을 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고열이 안떨어졌을 때, 밤새 잠못자고 간호하다가 다음날 출근했던 일들이 전혀 힘들지 않고 소중하고 값진 기억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