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누구나 우울은 가지고 살 것이라 생각한다. 우울과의 동거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이 이야기를 한 번은 글로 쓰고 싶었다. 생의 대부분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시험에 통과하여도, 도전해서 성공했더라도 그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안 겪었을 텐데 그러면 더 좋았을 텐데.'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것은, 입 밖으로 내면 어떤 행동이 이어질까 봐. 더 나아가 타인에게 넋두리를 늘어놓게 될까 봐. 그 넋두리가 돌고 돌아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그분들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
삶의 회의를 심어주신 분이 부모님이셨으나, 나를 정성으로 키우신 것 또한 알기에, 전교 1등을 한 번도 못한 나를 전교 1등 하는 딸로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신 고슴도치 엄마의 자부심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기에, '왜 나를 낳았어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어요.' 따위의 분란을 조장하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불 꺼진 부엌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울던 엄마에게 나까지 슬픔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내 안의 슬픔은 나만으로 충분하다. 어둠을 퍼뜨려 주위를 잠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살가운 딸은 아닌 걸로, 그 정도가 내 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조용한 보복이었다.
또한 아무도 이해 못 할 이야기였다. 누구는 내가 사람 복이 많다 하였다. 누구는 재능이 많다 하였다. 우수한 학생. 어디 내놔도 엇나가지 않을 믿음직한 아이. 재미있고 재치 있고 친해지고 싶은 아이라는 말도 들어보았다. 내가 손에 쥔 것이 루비, 사파이어, 진주 같은 빛나는 보석이라 하였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이 보석들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회색빛 조약돌로 보였다. 뭐 하나 탁월한 게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온통 무채색, 내 안에도, 밖에도 빛나는 색깔이 없다.
병원에서 심리 검사를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 '자살'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셨다. 이때에도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언어가 되어 내 입 밖으로 나오고 귀에 들리게 될 경우, 그리고 그것이 실체화되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리면 그 후에 무엇이 다가올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두려웠다. 그래서 적절히 돌려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티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해요."
겉으로 보기에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고 완벽주의자이다. 내 일상보다 일을 우선시 여기고, 내 삶보다 가족을 우선시 여기고, 내 행복보다 그들의 행복을 챙긴다.
그런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 내 마음을 마주하는 것도 어렵다. 다 잊어버리고 싶고 지우고 싶고 도망가고 싶다.
우울한 나를 이성적인 내가 수시로 비난한다.
이렇게 우울할 거면 너 혼자 살지 결혼은 왜 했니. 니 남편은 무슨 죄야.
이렇게 슬플 거면 애는 왜 낳았니. 그것도 둘이나.
너희반 아이들은 무슨 죄니. 선생님이 우울하면 애들도 학교생활이 괴롭지 않겠니.
그래서 더 자주 웃는다. 저질러 놓은 일이 있으니, 책임질 일들이 많으니 다만 앞으로 나아야 할 뿐, 뒤를 돌아보거나 후진할 수는 없다. 내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타인도 죽일 수는 없다. 내가 벌려놓은 일들이,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나를 살게 하고 버티게 한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어두움은 땅 속에 묻어 버리고, 그 위에 위장용 꽃을 심는다.
아재개그로 무장하고 가족과 학생들의 어이없는 웃음을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린다. 아이스크림이 죽었데. 왜 죽었게? (기대에 찬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정답은 '차가와서' (상대방의 어이없는 비웃음을 보며 즐거워하기)
봄이 오면 파릇파릇 올라오는 연한 초록색을 마주하며 딸들과 학생들에게 '이게 바로 너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초록이야'라고 말한다.
맛을 잘 모르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외식에 '정말 맛있다. 오기를 잘했네.'하고 식당을 고른 남편을 칭찬한다.
지나가는 이름 모를 꼬맹이들과 반려동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귀엽다.', '예쁘다'를 남발하며 '꺄악'을 외친다.
그런데 이놈의 우울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지(?) 썩지도 않고 수시로 땅 위로 올라와 자신의 존재감을 보인다. 그러므로 나의 남은 생은 땅을 더 깊게 파서 더 깊게 묻고, 그 위에 더 많은 꽃과 나무를 심는 노력의 시간이 될 듯하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생각을 버리지는 못해도
참 열심히 살았네. 고생했다. 쓰담쓰담해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