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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강 Dec 07. 2023

우리는 깜빡이 안 켜[신혼여행은 처음]

나를 위해 켠 깜빡이, 여기 이들은 안 켠다. 나를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렌터카 회사 몬테카를로(Monte Carlo) 직원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썩은 표정의 내 얼굴과 상반됐을 것이다.

암만에 내려서 그를 만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공항 입국 수속이 늘어진 게 컸다.

여기에 렌터카 회사 직원이 약속 시간을 반 시간 어겨 나타났다.

그런데 미안한 기색이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기에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약간 쳤던 빡이 생각나서 말이 또 샜다.


좌우간 거기서 직원을 따라서 사무실로 갔다.

렌터카를 인도받으려면 사무실에서 서류를 써야 했다.

차로 15분 정도 거리였다.

가는 길에 나와 처는 직원을 상대로 큐앤에이를 시작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요르단에서 대화를 나눈 사실상 첫 현지인이었다.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려고 짧은 호흡으로 별에 별 걸 물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요르단을 조금씩 이해해 나갔다.


가장 궁금한 건 요르단인의 운전 습관이었다.

혹자는 수도 암만에서 운전은 부산의 출퇴근 시간에 버금가는 난이도라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부질없는 게 운전 자랑 같지만, 서울살이 십수 년 하면서 운전이라면 이골이 났다.

그깟 운전쯤이야 싶었지만 외국에서 하려니 막상 약간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요르단 사람들 운전 험하게 하냐고 물었다.

요르단 시내 암만을 지나는 차량. 깜빡이와 경적이 고장 나도 운전하는 데 지장이 없는 도시이다.
우리는 깜빡이 안 켜


방향지시등(깜빡이)을 켜지 않는 게 이 사람들의 운전법이란다.

깜빡이를 켜는 사람은 외국인이란다.

이상했다.

나는 깜빡이를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여긴다.

내가 차선을 옮길 테니 운전에 주의하라고 타인에게 알리는 것.

이건 다른 운전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나를 적극적으로 지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깜빡이를 켜지 않고 내 앞으로 들어오는 차를 보면 화가 나는 동시에 가엽다.

그 운전자는 스스로 소중한 존재일 텐데, 스스로가 이걸 아끼지 못하고 부정하는 게 말이다.


그런데, 요르단에서는 깜빡이를 켜지 않는다고 한다.

직원의 대답을 듣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요르단인은 자학적인가.

실제로 운전해 보니 직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암만 시내에서 깜빡이를 켜고 다니는 현지인을 본 게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일일이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깜빡이를 켠 운전자를 볼 때마다 진짜로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여기 차가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암만에서 겪은 운전은 출퇴근 시간 서울 강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깜빡이를 켜지 않고서도 차들이 잘도 지나간다.

정말로 그냥 쑥 들어온다.

한국 같으면 클랙션을 눌러야 하는 상황이 계속 생긴다고 보면 된다.

직원이 했던 말이 또 생각났다.


우리는 클랙슨 안 눌러


도대체 서울에서 경적(클랙슨)을 안 듣고 운전하는 게 가능할까.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더라도 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우도 다수다.

그런데 요르단인 대부분은 경적을 안 누른다.

그래도 차가 움직이고, 이 움직임은 교통 흐름이 된다.


결국 나의 깜빡이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방어한다는 건, 상대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전제에서 비롯한다.

아마 경적을 울리는 행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대로 거슬러가보자.

깜빡이도 안 켜고, 경적도 안 누르려면,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된다.

요르단이 그랬다.

여기 운전자는 자기 앞으로 차가 들어오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사실 내가 겪은 경험은 일부일 뿐이라서 일반화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 인식으로는 요르단인은 상대에게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운전하는 흐름에서 나는 일말의 위협도 느껴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나는 요르단은 안전한 나라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요르단 사람들 정말 호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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