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은 공간에 대한 예의다

유통기한 지난 과거의 욕심들을 쓰레기통으로

by 리치블라썸

육아휴직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멈춤' 그리고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늘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치고 살았던 집안의 구석구석이,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난 뒤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하나둘 선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해묵은 옷장을, 오늘은 아이방의 장난감들을 하나씩 꺼내어 정리해 봅니다.


정리를 하다 마주한 것은 20대의 나였습니다. 옷과 화장품, 신상이라면 무조건 사고 보는 그 시절, 언젠가는 입겠지, 언젠가는 바르겠지 하며 쟁여두었던 욕심들이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지금의 내 취향과는 멀어진, 하지만 버리지 못해 짐이 되어버린 것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소중한 공간에, 왜 나는 사용하지도 않는 짐들을 이토록 방치해 두었을까."


나를 지켜주고 우리 가족을 품어주는 보금자리에 대한 반성이 밀려왔습니다. 물건을 비워낸 텅 빈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후련하고 개운했습니다. 그 텅 빈 여백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 귀한 자리를 불필요한 욕심으로 채우지 않겠다고 말이죠.


저는 아무리 바쁜 날에도 반드시 지키는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눈을 뜨자마자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사소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제게 잠자리 정돈은 이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이자 '예의'입니다. 밤새 나의 고단함을 받아준 침구에 대한 인사이고, 오늘 하루를 정성껏 살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비워진 서랍과 팽팽하게 펴진 이불을 보니 문득 깨달음이 옵니다. 그동안 버리지 못했던 건 물건이 아니라,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과거의 욕심들이었다는 것을요. 이제야 비로소 그 무거웠던 기대들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기분입니다.


화려한 옷이나 화장품이 나를 빛내주던 시절보다, 이렇게 깨끗한 여백 위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공간에 예의를 갖추는 이 시간들이 모여, 다가올 마흔의 나를 더 단단하게 빚어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