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시간’을 저축한다

돈 대신 품앗이로 노후를 설계한 도시

by 이연

자원봉사를 하려면 먼저 로그인을 해야 한다.
이름을 쓰고, 인증을 하고, 지역을 고른다.
화면에는 프로그램이 뜨고, 옆에는 작은 글씨가 붙는다.
‘마감’. ‘승인 대기’.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충분한데, 왜 자리는 닫혀 있을까.


스위스 St. Gallen에는 조금 다른 구조가 있다.
이곳은 자원봉사를 “선한 마음”으로만 두지 않는다.
시간을 **‘개인의 시간계좌’**에 적립하고,

나중에 내가 늙었을 때 다시 돌려받도록 설계한다.
이름하여 Zeitvorsorge(시간저축).
쉽게 말하면, ‘돈이 아니라 시간으로 하는 품앗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활동 가능한 시니어(대략 은퇴 연령대)가

더 고령의 어르신 곁에 가서

동행, 이동 지원, 가벼운 집안 도움, 말벗, 간단한 행정 도움 같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 계좌에 쌓인다.

훗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시간을 서비스로 돌려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따뜻함’이 아니라 ‘장치’다.
이 시스템은 시간을 돈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의외로 차갑고 엄격한 규칙을 함께 둔다.

첫째, 시간은 양도·거래·상속이 안 된다.
세법(과세) 문제를 피하고, 시간이 화폐처럼 변질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내가 쌓은 시간은 결국 내 삶을 위해 쓰는 시간이다.

둘째, 무한정 쌓지 못한다.
개인은 최대 750시간, 부부는 1,500시간까지.
그 이상은 ‘사회기금(소셜펀드)’으로 넘어가 시스템 전체의 안전망이 된다.
즉, “내가 남긴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의 안전으로 남는다.

셋째, 활동은 ‘개인이 알아서’가 아니다.
처음엔 면담과 적합성 확인을 하고,
활동이 시작되면 기관이 연결하고 관리한다.
시간 기록도 대충이 아니라, 활동자가 보고서를 쓰고 수혜자가 서명한다.
시간은 따뜻하지만, 기록은 냉정하다. 그래야 오래간다.

이 구조를 보며 나는 질문이 바뀌었다.
“봉사할 사람이 왜 없지?”가 아니라,
“봉사할 사람의 시간과 능력을 어떻게 설계해서 돌봄으로 연결할까?”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사회다.
은퇴 후 시간을 제2인생으로 잘 관리한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 손잡아주지 않으면 공원만 맴돌다 집 밖을 끊는 사람도 있다.
특히 독거 어르신은 더 쉽게 멈춘다.
그 ‘멈춤’은 외로움이고, 결국 돌봄의 비용이 된다.

스위스의 시간저축은 말한다.
시간은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관계의 안전장치로 설계될 수 있다고.

나는 여기서 ‘품앗이’라는 단어를 다시 꺼내 본다.
품앗이는 추억이 아니라 구조였다.
오늘 내가 누군가의 하루를 돕고, 내일 누군가가 나의 하루를 돕는 구조.
적립은 숫자를 남기지만, 제대로 설계된 적립은 결국 신뢰를 남긴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글에서는 스위스를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더 냉정하게 묻겠다.

“이걸 한국에 그대로 들여오면, 어디에서 막히는가?”
보험, 책임, 세법, 운영 인력.
좋은 생각이 현실에서 멈추는 지점을 한 번 ‘땅을 딛고’ 짚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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