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뽀송한 날들 - 기분 좋았던 날

by 원호

“이번 정류장은 서울구치소, 서울구치소입니다. 내리실 분은… ”

버스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다. 유튜브로 뉴스를 틀어놨었는데, 중간에 깜빡 잠들었던가 보다. 뉴스에 나오는 유명인을 늘 한두명쯤 품고 있는 서울구치소가 우리집 바로 전 정류장이다.


아, 오늘은 여기서 깨서 다행이다. 잠들어서 혹시 몇 정류장 더 갔으면 잘못 내린 곳에서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집까지 터덜터덜 돌아와야 한다. 서둘러 벨을 누르고 가방을 메고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우리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가 서자마자 얼른 일어나서 내렸다.


오늘 오후에 신경 쓰이던 보고가 있어서 많이 긴장했었다. 다행히 보고는 큰 무리 없이 잘 지나갔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지만 일단 오늘은 긴장이 풀려서 오후에도 나사빠진 채로 일했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건너야 아파트 단지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녁반찬이 걱정된다. 방향을 바꿔서 반찬가게로 향했다. 어떤 메뉴가 좋을지 모르겠는 나를 위해서, 맛있으면서 몸에 좋고 적당히 한끼에 먹을 수 있으면서 비싸지도 않은 메뉴가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안고….


하지만 반찬가게에는 메인 반찬은 거의 다 팔렸는지 안보이고, 멸치볶음, 진미채볶음 같은 몇 가지 밑반찬만 남아있다. 하…망했다. 오늘 큰 딸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바로 간다고 했고, 둘째는 여덟시쯤 되면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텐데…. 시간은 벌써 일곱시가 넘었다. 오늘도 김치볶음밥인가. 살만한 반찬이 없어서 빈손으로 가게를 나섰다.


집으로 와보니 웬 걸, 어제 어머니가 싸주신 꽃게찌개, 오이소박이, 진미채에 쑥부침 할 반죽까지 있다. 맞다, 맞다! 아, 살았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제는 주말이라 오랜만에 아가씨네랑 같이 부모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었다. 아가씨가 같이 일하는 분이 추천해주신 맛집에 갔었는데, 어느 대감집처럼 지어진 기와집에서 갖가지 두부요리를 파는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 댁에 과일 먹으러 가니 어머니가 미리 싸놓은 반찬을 꺼내주셨었다.


집으로 들어와서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손만 씻고, 찌개 데우고, 쑥부침을 부쳤다. 어제 시어머니가 부침은 건강을 생각해서 진짜 안 먹어야 된다면서 반죽을 싸주시던게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밤에 커피 사러가면 정성스레 커피를 내려서 나에게 건네시면서 이거 먹고 지금 잠이오냐고 걱정하시는 동네 커피숍 할머니 사장님도 비슷하시다. 어른들이 걱정해주셔서 나는 걱정안하고 먹어도 될 것 같은 느낌!


쑥부침 향을 맡자니 더 배고파진다. 가장자리가 바삭바삭하게 두 장 구웠다가 배가 고파서 한장 더 구웠다. 아침에 먹고 남은 계란찜도 데우고… 금요일에 친정엄마가 싸주신 갓김치도 꺼냈다. 오이소박이, 쑥부침, 진미채를 놓고, 꽃게찌개까지 놓으니 오늘은 완전 진수성찬이다.

여덟시가 다가오자 익숙하게 번호키를 누는 소리가 난다. 지호다. 나는 얼른 뛰어나가서 팔벌리고 지호를 안았다. 말랑하고 향긋한 우리집 둘째 지호.

“오늘은 학원차 멀미안났어?”

“괜찮았어.”


지호와 둘이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은 시댁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날이라, 이미 저녁을 먹었다. 아들이 저녁먹으러 안오면 어머니가 자꾸 고구마나 빵 같은 걸로 저녁을 떼우자고 하신다는 아버님의 하소연에 따라, 두 분의 화목과 건강한 저녁을 위해 남편은 일주일에 두 세번 시댁에서 저녁을 먹고 온다.


오자마자 남편은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하나씩 넣으면서 지호와 나의 수다에 끼어들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밥한공기와 부침 두 장을 말끔히 먹은 나는 선언하듯 말했다.

“나 오늘 회사에서 힘들었으니까 부침 두 장 더 구워서 와인하고 먹을꺼야.”

내 선언에 지호가 끼어들었다.

“나도 오늘 학원 두개 가느라 완전 힘들었으니까, 비타오백 사 먹을꺼야. 엘리하이에서 포인트로 산거 있어. 엄마, 나랑 같이 GS25 가자.”


남편은 둘 다 돼지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놀렸지만 우리는 손을 잡고 동네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파트 상가에 편의점이 세 군데나 있었는데, 한군데가 갑자기 점포정리를 하고 장사를 접어서 이제 두 곳만 남았다. 우유가 싸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편의점이 문을 닫아서, 오늘은 그 옆에 있는 곳으로 간다. 여기는 우리 큰 딸이 좋아하는 곳이다. 저번에 큰 딸하고 같이 뭐사러 갔더니 무뚝뚝한 사장님이 세상 밝은 얼굴로 우리 딸을 보면서 “아이고, 우리 단골왔네.” 하셨던 바로 그 편의점! 우리는 거기서 지호가 산 기프티콘으로 비타오백을 하나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 잎 남지 않은 벚꽃 나무가 바람의 힘을 빌어 마지막으로 털어내는 벚꽃을 맞으며 걸었다. 어디선가 바람에 라일락 향기도 묻어왔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는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비행기구나.

“엄마, 저 비행기는 어디 가는 걸까?”

“글쎄… 니가 물어보니까 엄마도 갑자기 궁금해지네.”


지호랑 지도앱을 열어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니 인천쪽이다. 여행을 마치고 ‘벌써’ 혹은 출장을 갔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인가 보다. 지호와 나도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남편이 그사이 쑥부침을 두 장 더 구워두고, 거실에 엎드려서 요즘 푹 빠져있는 무협지를 읽고 있다. 어머니가 산에서 따오셨다는 쑥이 순하고 향긋하다. 마침 집에는 선물받은 포트와인이 있다. 찾아보니 도수가 높고 달달한 와인이라고 한다. 찬장에서 자리만 차지하다가 유행이 지나버린 와인잔을 꺼내서 얼음을 몇 개 넣고 와인을 부었다. 살짝 맛을 보니 그래도 알코올 20프로는 나에게 좀 강하다. 물을 살짝 탄다. 당나라 시음법이다.


지호도 와인잔에 얼음을 넣어주었다. 지호는 비장하게 비타오백을 와인잔에 부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잔을 부딪혔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지호야, 오늘도 수고했어.” 의자에 앉은 지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엄마도 오늘 수고했어.” 지호가 나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러고는 서로 쳐다보면서 깔깔 웃었다. 물탄 와인 맛이 끝내준다. 곰돌이 푸의 말이 떠올랐다.


“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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