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여행) 228 화평공원과 장제스 기념당

2025.1.24/25

by 원호

시작은 좋았다. 호텔 조식에 베이컨과 계란 후라이는 없었지만 모찌가 달짝지근하니 맛있었고, 호텔방에 순서없이 늘어놓았던 짐도 모두 여행용 가방에 때려넣고 깔끔하게 정리해두고 방을 나섰다.


대만여행 이틀차, 순조로운 시작이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대만박물관이다.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 놓아 마음이 바쁘다. 10시에 시작하는 가이드 투어에 맞추려고 9시 30분에 시먼딩에 위치한 호텔을 나섰다. 닥치는 대로 여행을 추구하던 내가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는 거의 첫 여행이라 그런지 설렘 섞인 긴장감에 배가 간지러울 지경이다. 구글지도를 펼치고 단순한 직선도로 인데도 가는 길이 맞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걷는다. 한문 간판이 많은데,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거의 없어서 아무런 정보가 없다. 번체는 그래도 좀 읽을 수 있을줄 알았지.


9시 40분. 드디어 공원안에 위치한 대만박물관에 도착했다.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다. 국립박물관이라 그런지 넓은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꽤 넓은 호수가 공원 안을 강처럼 흐른다.

호수 위에 솟은 작은 바위에는 거북이 가족과 오리 두 마리가 느긋하게 일광욕중이다.

가이드 투어 종이를 다시 살펴보니 45분까지 지하입구로 오란다. 박물관 입구인데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모르겠다. 이럴때는 물어보는게 최고다. 박물관 입구의 경비아저씨에게 투어종이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아저씨 표정이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국립박물관에서 일하시는 분이 내부 위치를 잘 모른다는 게 실망스러워지려는 찰나, 아저씨는 우리는 information으로 안내했다. 안내소의 직원도 고개를 살짝 흔든다. 갸우뚱하면서 고개를 흔든 그는 투어 종이를 유심히 살피다가, 내가 온 곳은 "대만 국립 박물관"이고, 투어 종이에 있는 장소는 "대만고궁박물관"'이라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 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서로 답답하다. 안내소 직원은 내 구글 지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지도를 스크롤로 북쪽, 더 북쪽으로 옮겼다. 그때까지는 내 화면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어느 먼 지점을 찍으면서 내가 가는 곳은 여기라고 한다.


헉! 여기가 아니다. 진짜? 이것이 현실인가. 잠깐의 버퍼링 후에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삼만원이나 주고 가이드 투어를 예약했는데... 그때부터 멘붕이 왔다. 우리는 더듬더듬 영어로 대충 저런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지하철 타고 가셔서 버스로 갈아타고 가시면 되요."

"얼마나 걸려요?"

"빠르면.... 삼십분."

"헉! 혹시 택시 타면 빠른가요?"

"음.. 더 빠를 때도 있는데, 출근시간에는 아시죠? 트래픽잼. 시간을 예상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일단은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밖으로 나서서 택시를 잡아야하나 지하철로 가야하나 방황중이었다. 어쨌든 투어 앞부분은 놓칠 게 확실하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투어담당자분의 오고있냐는 확인 전화다.

"가이드투어 예약하셨죠?"

"네. 근데 저희가 잘못 찾아와서요."

투어가이드분은 우리가 국립박물관에 있다는 말에 황당해 하면서도 우리 투어를 오후로 바꿔주셨다. 너무 황당해 하시는 거 보면 우리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가 보다. 여행전 열심히 조사를 했던 나도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에라이, 계획은 뭔노무 계획이냐.


가이드 투어가 두시로 바뀌는 바람에 오후 두시까지 시간이 남았다. 우리는 다시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조형물과 알수 없는 인물들의 흉상(나중에 찾아보니 대만인1호로 불린다는 정성공이다), 호수에 예쁘게 걸쳐진 다리까지 잘 꾸며진 공원이다. 다음 목적지인 장제스 기념관으로 걸어가면서 천천히 공원을 살핀다. 젖을 듯 말듯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바람은 선선하고 1월 말인게 믿기지 않도록 한가하고 여유로운 가을 날 같다. 장제스기념당으로 가기위해 공원출입문을 나서면서 비로소 공원이름을 확인했다. 다른 상호는 한자로 표기되어 까막눈인 나에게 있으나 마나지만 여기있는 한자는 모두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二二和平公園(이이팔화평공원)

228 Peace Park


화평이라는 글자는 무언가 다른 말이었다가 지워져서 화평으로 고쳐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영어로 Peace 도 마찬가지다. 228은 날짜일테고, 무언가 평화와 반대되는 폭력사건이었겠구나 하고 문을 나섰다.

문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바로 보이는 것이 총통부 건물이다. 역대 총통을 기념하기 위한 건물이 화려하게 서있다. 가운데 높게 솟은 첨탑에 대만기가 걸려있고,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은 어렸을적 국립박물관, 옛 총독부 건물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는 한국의 종각 쯤 되는 곳인가보다.

주변의 학교와 유치원 같은 건물들을 구경하면서 부지런히 걷다보니 장제스기념당에 도착했다. 뜬금없이 웅장한 주황색 기와를 한 건물이 먼저 나타나서 이게 멋지게 지은 지하철 역인지 아닌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주황색 기와 건물을 감싸고 있는 담벼락을 따라 걷다보면 "헉"할 정도로 웅장한 장제스 기념당 대문이 나타난다. 이건 정말 깜빡하고 놓칠수가 없는 크기다. 무엇을 기념하고 싶어했든지간에 규모가 압도적이다. 2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기념당 대문의 위쪽에는 "자유광장"이라는 말이 씌여있다. 여행용 가방을 펼치면 넘어다녀야하는 작디 작은 호텔방을 잠시 떠올렸다.


대문 양쪽으로는 똑같이 생긴 주황색 기화의 중국식 건물이있다. 하나는 국립음악청이고 하나는 국립연극원이라고 한다. 주황 기와의 단정하고 화려한 건물 입구에는 십대, 이십대로 보이는 대만 청년들이 모여서 케이팝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다. 이 모습도 양쪽 건물이 동일해서 웃음이 났다.

광장의 가운대 즈음에 대만깃발이 높이 꽂혀있고 그 너머 사진으로 보았던 장제스 기념당이 있다.

사진으로 볼 때는 우리나라 독립문 만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규모가 직접 보아야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다. 장제스 기념당 내부로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서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도록 미국과 영국을 설득하고 이를 문서로 남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높은 계단을 올라 장제스동상을 보고 내려와서 정각에 군인들 교대식까지 구경했다.

우리나라 경복궁앞에서 전통 교대식을 본 적이 있다. 경복궁에서 군인들이 왕을 지키기위해 근무를 서고 시간이 되면 교대를 한 것일텐데, 장제스 사후에 지어진 이곳에서 군인들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구경을 하고 나서는 시먼딩으로 돌아와서 우육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바질로 국물을 낸 뜨끈한 면을 맛있게 먹고 다시 오후 여행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스린역으로 무려 택시를 타고 인터넷에서 보던 그곳 "국립고궁박물관"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잘 왔다! 가이드분이 우리를 보고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셨지만 실패했다.

"아니, 어떻게 거기로 가셨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가신 김에 박물관은 돌아보셨어요?"

"아니요. 아까는 당황해서 그생각을 못했어요. 야구 전시 같은 거 하고 있던데... 야구 무슨 상탔나봐요. 다른데 가는 길에 거기 공원은 돌아봤어요. 너무 좋던데요."

"아, 거기가 228 관련 공원이죠?"

"네. 그렇게 써있더라구요. 228이 무슨 사건이에요?"

"네. 그게 좀 큰 사건이에요."

잠시 말이 끊어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228이 큰 사건이죠."


나는 다음말을 기다렸지만, 관광이 시작되면서 228관련해서 들을 기회는 없었다. 궁금한채로 고궁박물관을 구경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배추도, 동파육도, 24단 구체도 모두 없었다. 12월 특별전 이후로 지금은 모두 타이난에 있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본 것을 사진으로 보면서 설명으로 듣고, 고궁박물관 투어는 마무리되었다.


돌아올 때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228을 검색했다. 대구 228 학생도서관, 대구 중구 228 공원 등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뒤에 228사건이 보인다. 228사건을 검색하고 내가 놀랐던 것을 보면 나는 꽤 최근의 민주화 운동 일꺼라고 예상했었나보다.




228 사건은 1947년 2월 28일에 발생했다. 일본의 오랜 식민지배 끝에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을 지배하게 되자 본성인들은 이를 매우 반겼다고 한다. 하지만, 명말청초에 대만으로 이주한 본성인들과 국공내전을 전후하여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차별이 존재했고, 통치는 일제 이상으로 가혹했다고 한다. 이러한 차별과 폭압은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 시위를 불러온다. 정부의 전매를 어기고 담배를 판매했던 가난한 본성인 여인이 무자비하게 매를 맞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 군이 발포하여 학생한명이 사망하면서 본성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이다.

1947년 2월 28일, 분노한 군중은 발포 공무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하지만 대만 경비총사령관 천이는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경찰서에 난입해 경찰을 구타했고, 몇몇 경찰들은 죽음에 이르렀다. 경비총사령관 집무실로 향하던 본성인들을 향해 군인들이 발포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시위는 점점 격렬해져서,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봉기는 삽시간에 대만 전역으로 퍼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비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아래 4개 사항을 약속한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이 결과에 따라 3월 2일 오전 10시 국민당 정부의 핵심인사와 군중대표들이 참가한 "228사건처리위원회"가 구성된다.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리위원회에 대한 대만 주민들의 지지는 높아졌고, 이들은 민중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민당의 무능에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32개조 요구로 구체화 되었고, 경비총사령관 천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경찰의 발포를 금지하는 대신, 군중집회에는 해산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사건이 해결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천이는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장제스에게 국민혁명군의 협조를 요청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중임에도 군대를 대만으로 파견하고, 47년 3월 8일부터 유혈진압이 시작된다.


'공무원은 즉시 출근하라. 학생들은 반드시 등교하라. 노동자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출근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출근하던 공무원들은 모두 사거리에서 죽었다. 등교하던 학생들은 교문어귀에서 차례로 죽어나갔다. 노동자들은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생존자 증언


이러한 살인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바이충시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이미 섬전체가 학살과 약탈로 초토화 된 후였다. 사망자는 3만에 달했다.


그로부터 약 2년뒤 1949년 5월에 국공내전에서 패색이 짙은 국민당이 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기면서 228사건은 모두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았다고 한다. 1987년 38년간 지속되던 계엄이 해제되면서 비로소 대만은 이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2%C2%B728_%EC%82%AC%EA%B1%B4)



대만으로 오기 전, 하루 종일 뉴스를 듣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여행동안 뉴스를 일절 보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여기서 다시 계엄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228 사건 속에서 거짓말하는 국가 관리의 입에 분노하는 것은 정의감이 아니라 동질감이었다.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군에 대한 이야기는 자칫 우리에게 일어날수도 있었던 최근 일련의 뉴스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다음 날 아침 투어를 시작하기전 시간이 있어서 다시 한번 228공원을 찾았다. 대만 총통부 앞인 228 공원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당혹스러웠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한가롭게 공원을 걸었다.

공원에서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는 대만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내 친절했던 대만 사람들에게 이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228 사건을 검색하면 함께 나오던 대구 228 사건은 1960년 대구의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되었던 민주화 운동이었고, 이후 419로 가는 도화선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날 마음 졸이게 했던 대통령의 구속기소 소식을 들으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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