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와 구찌
두 달가량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는 유럽 전역에서 사용이 가능하고 사용기한이 한 달짜리가 아닌 연장가능한 유심칩이 필요했다. 하지만 파리를 처음 와본 나로서는 내가 원하는 유심을 손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한 달만 사용할 수 있는 유심칩만 수두룩했다. 물론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훨씬 더 컸을 테지만 말이다.
파리를 떠나 순례길의 출발지로 가기 하루전날 숙소 근처에서 걸어 오분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만물상을 가게 됐다. 숙소 근처에 있던 그곳은 오고 가다 가게 유리문에 유심에 대한 포스터가 붙어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가게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섰을 때, 가게 안에는 주인과 프린트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다. 그녀는 며칠은 씻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곱슬곱슬한 하얀 털로 무성한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긴 갈색머리에 짙은 쌍꺼풀과 까무잡잡한 피부는 동남아시아계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우선 주인에게 필요한 유심에 대해 설명을 해주니 한 가지 유심칩을 소개해주었다. 가격은 대략 한 달에 심카드 비용 포함 30유로 정도로 한화로 치면 약 43000원 정도였다.
처음 내가 생각했을 때보다는 비싼 편이었지만, 당장 내일 떠나는 입장에서 더 이상 가릴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난 그 유심을 구매하려던 찰나 가게 안에 있으시던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다 알아보고 사는 거야? 이 가격이 절대 싼 가격은 아니야. 조건도 네가 원하는 만큼 그리 좋은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내가 내일 당장 떠나야 해서 어쩔 수 없어.”
“지금 내가 쓰는 유심은 이것보다 조건도 훨씬 좋고 가격도 훨씬 싸. 유럽 내에서는 다 사용이 가능하고. 네가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참견하는 게 조금 의심도 되긴 했지만, 아직 한두 시간 정도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한번 부탁드려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가게 주인아저씨는 불같이 화를 냈고 그녀도 그에 뒤쳐질세라 맞받아쳤다. 중간에 낀 내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다. 그렇게 큰소리가 오갔고 아주머니는 가게를 나가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했다.
“한국친구. 네가 여기서 사는 게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난 같은 아시안계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얘기할게. 내가 널 도와줘도 될까? 선택은 네가 해 야해.”
“….”
혼란스럽던 상황에 있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정을 하고 주인아저씨께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아주머니를 따라 가게를 나왔다. 한바탕 소란이던 가게를 나오고 나니 조용하고 한적한 파리거리가 보였다.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가게 밖에서 그녀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 이름은 테스였고, 테스는 필리핀계 캐나다사람이지만 파리에서 생활한 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워낙 자신들의 언어에 자부심이 강한 이유에서인지 불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프랑스에 왔을 때,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힘든 점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어를 사용하는 것에 조금의 불편함이 없는 테스는 같은 아시안계 사람들을 이곳에서 볼 때마다 도와드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테스가 말을 처음 걸었을 때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그렇게 우린 근처 유심침판매를 하는 가게를 찾아갔다. 프랑스는 신기하게도 ‘TABAC’이라는 담배가게에서 대부분의 유심을 살 수 있었다. ‘TABAC’은 마치 우리나라 편의점과 정말 오래된 동네골목길에 있는 구멍가게를 반반 섞어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테스가 지금 쓰고 있는 유심은 팔지 않았다. 테스는 한참을 핸드폰으로 찾다 여기서 차로 15분 정도 되는 곳에 지금 사용하고 있는 ‘free’라는 통신사 유심 매장이 있다고 해 우린 우버를 타고 이동했다. 운전사가 프랑스인이 아니었던 걸까? 우린 다행히 매장 문 닫는 시간 10분을 남기고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스가 매장 직원에게 유창한 불어로 나 대신 설명을 해주고 나니, 한 달 11유로 한화로 약 15000원에 무제한 격의 유심칩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유심칩은 유럽전역에서 사용이 가능했으니, 계획했던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찾아봤던 조건보다도 더 좋은 조건으로 사게 된 것이다.
우린 매장을 나와 동네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테스는 연신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테스와 얘기하면서 속으로 조건 없는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됐다.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에게 그저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는 행동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마음으로 인한 온기가 나를 감쌌다. 동네에 도착한 후 난 테스에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봤지만, 테스는 고맙지만 지금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저녁을 함께 먹을 순 없다고 했다.
오늘 이렇게 도와준 거에 대해서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고 미안하다고 하니, 테스는 너와 얘기하고 같이 다니면서 네가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며 네가 만약 여행을 모두 마치고 다시 파리로 오게 되거나 나중에라도 다시 파리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그때는 꼭 같이 밥 먹자고 하는 그 말에 난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커졌다. 그렇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우린 전화번호를 공유한 후, 테스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는 혼자 저녁을 먹으러 숙소 근처 인도음식점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