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과 클라리스 02
친구들이 떠난 곳에서 난 다시 혼자였다. 물론 이네스가 여전히 내 옆을 지켜주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렇게 느끼는 내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 만나기 힘든 인연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의지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 내게 낯선 감정으로 다가온 게 아닐까 싶다.
한동안 시간이 남게 된 나와 이네스는 레온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이네스가 통화를 하고 나선 서둘러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마침 레온 미술관에 가보고 싶었기에, 우린 이따 숙소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그렇게 이네스는 갑자기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터미널방향으로 갔고 난 숙소에 돌아가기 전 레온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들을 보며 걷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일 오전시간 그들의 일상은 서울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어떤 이는 자기 점포 앞을 청소하며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멘 손녀의 손을 잡고 학교로 데려다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서울보다 도로가 넓지도 않고 차도 많이 없어서인지, 이곳의 일상이 조금은 더 평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오래된 건물들로 인한 고즈넉한 풍경과 시끄러운 자동차소리가 많이 없는 게 내가 그러한 기분을 느끼게끔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곳에서의 기분을 팜플로나에 있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는데, 이곳 레온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아지는 풍경들을 보며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미술관 오픈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출출하던 찰나에 마침 길 건너 조그마한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곧장 길을 건너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람들 몇몇이 있었는데 대부분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왠지 이 레스토랑은 햄버거가 시그니처 메뉴일 것이란 생각에 햄버거와 콜라 세트를 시키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출출하던 배를 채우고 나니 가득하던 먹구름이 지나가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 가방에서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배도 적당히 부르고 햇살마저 따뜻해서 노곤노곤 잠이 왔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의자 하나를 더 가져와서 발을 올려놓은 채 앉아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그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보니 어느새 미술관 오픈 시간이 다 되었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주한 레온 미술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관리도 상당히 잘 된 상태였다. 광화문에 있는 국립현대 미술관만큼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1/3 정도는 되는 크기였다. 미술관에 들어가 보니 내부도 상당히 청결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술관이나 갤러리등에 갔을 때 그 장소의 컨디션을 알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장소의 화장실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화장실의 컨디션으로 공간 전체적인 컨디션을 체크해 볼 수 있었는데, 이건 전시 공간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점이든 카페든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이날 이곳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는 젊은 스페인 작가들의 기획전이었다. 다섯 명의 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전시였는데, 그들이 누군지는 몰랐으나 나름 흥미로운 점들이 있던 전시였다. 그중에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타일에 그림을 그려 조합한 작품이었다. 적어도 수백 개는 돼 보이는 타일의 조합으로 전시한 작품이었는데, 그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크기뿐만 아니라 타일 하나하나의 문양이나 이미지도 인상적이었는데, 여러 요소들 중에서도 작품의 색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도 작업을 하고 많은 전시를 보러 다니지만, 확실히 색을 쓰는 데에 있어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제한을 두려는 성향이 느껴지는 반면, 서양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색을 쓰는 데에 있어 자유도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단순히 자유도만 높은 게 아닌 색들의 조화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국내 작가들 중에서도 다양하게 잘 활용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색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허용의 범위를 스스로가 억제시키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작업을 할 때의 과정이나 결과물을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평상시에 옷을 입고 다닐 때에도 그런 부분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서 색을 억지가 느껴지지 않게 싸는 작품들을 보면 항상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혼자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생장에서의 첫째 날과 중간마을에서 인연을 쌓았던 프랑스 친구들인 조나단과 클라리스에게 연락에게 연락이 왔다.
“순호! 잘 걷고 있어?”
“응. 물론이지! 근데 어제부터 좀 쉬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쉬고 싶어서”
“그렇구나. 나랑 클라리스는 이제 곧 레온이야!”
“어? 레온이라고? 나 지금 거기 공립 알베르게에 있어!”
“기다려!"
조나단과 클라리스에게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알려주니, 그들은 레온에 도착해서 찾아가겠다며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갑작스러웠지만, 어제에 이어 또다시 그립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내 계획으로는 며칠 머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쉴 생각이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친구들을 만나다고 생각하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사람과의 인연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에 갈 때는 천천하고 차분한 발걸음이었다면, 두 친구의 연락을 받고 숙소로 돌아갈 때에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쯤 시간을 보니 1시 30분쯤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서인지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선잠에 든 채 노곤히 잠을 자고 있던 찰나 숙소 방문 밖에서 걸걸한 여자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