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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살자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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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순호 Jul 18. 2023

Episode 23

Miguel 03

 그렇게 좋았던 하루를 에너지 삼아, 며칠 동안은 그리 힘들지 않게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몸이 가벼워지고 걷는 것에 있어서 몸이 완벽히 적응했는지 걷는 속도도 빨라지고, 그만큼 많이 걸어도 몸이 지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함께 걷던 친구들보다 자연스레 앞서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걸을 때엔 좋은 거든, 힘든 거든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았고, 홀로 길을 걸을 때면 그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혼자 걷는 상황만이 줄 수 있는 좋음이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느꼈던 하루가 지나고 며칠 후 레온이라는 큰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800km쯤 되는 산티아고 순례길중의 하나인 프랑스길에는 150-200km 정도마다 큰 마을이나 도시들이 있었는데, 레온도 그런 도시들 중에 하나였다. 레온에 도착하기 전날 이미 많은 거리를 걸어서 레온으로 향하는 날엔 미적거리다 출발했음에도 평소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그날의 목적지로 정해놓은 마을에 보통 4-6시쯤 도착했다면, 이 날엔 점심시간도 전인 11시쯤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정해놓았던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예전에는 수녀원으로 쓰던 공간을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내부를 개조해서 운영 중인 공립 알베르게였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리자로 보이는 통통하고 인상 좋아 보이는 아줌마 한 명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테레사(실명)라고 소개했다. 혼자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테레사는 내게 숙소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는지 나를 숙소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이곳에서는 트레킹화 먼지를 털어야 하고, 또 이곳에서는 빨래를 하고 저기다가 널면 된다며 숙소 이용방법에 대한 부분들을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숙소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줄 게 없었는지 잠시 말이 없다 커피 한잔을 타다주며, 잠깐 의자에 앉아보라 했다. 

 그녀는 내게 ‘레온’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한참 동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몸이 고단하지 않아 그 설명들이 그다지 귀찮게 느껴지진 않았다. 숙소와 도시에 대해 설명을 쭉 듣고 난 뒤,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여기서 3일 정도 머물 수 있을까?”

“3일? 물론이지. 그런데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는 청소시간이라 그때는 잠시 나갔다가 와야 해. 괜찮아?”

“물론이지! 그 정도는 문제없어!”

“네가 원한다면, 이곳에서 언제까지고 있을 수 있어”


 난 이곳에서 2-3일 정도 머물면서 쉬는 시간도 좀 갖고, 레온이라는 도시도 천천히 구경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레온 미술관이 있었고, 마침 꽤나 흥미로운 전시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하루는 쉬면서 친구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하루는 미술관도 가고 도시 구경도 하고 나서 그동안 걸으면서 필요했던 것들을 사러 데카트론이라는 아웃도어 매장도 들려볼 생각이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 며칠 밀린 빨래를 했다. 자리에서 짐들을 정리하다 보니, 한 코스정도 뒤에서 걷고 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헤이! 순호! 지금 어디야? 혹시 레온?” 

펩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응, 나 좀 전에 레온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정리 중이야.”

“알았어.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응?”


 펩은 지금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가는 중이라며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사진 속엔 펩과 미겔, 후안, 리사가 함께 있었다. 친구들은 함께 길을 걷던 중에 안 그래도 발이 좋지 않았던, 후안의 발 상태가 더 안 좋아져 레온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마침 3-4일 정도 혼자 지내다가 친구들이 온다고 하니 잔잔하게 흐르던 마음에 기분 좋은 파동하나가 생긴 것만 같았다. 딱 혼란스럽지 않을 정도의 기분 좋은 일렁임이었다.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설레하고 있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오는 것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 게 오랜만이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감정이 싫어서라 아니라,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정에 대한 내 모습이 낯설었다. 항상 느껴왔던 감정에 내가 익숙해져 지냈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렁이던 마음속 호수가 다시금 잔잔해져 갈 때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숙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숙소에서 순례자들이 지내는 곳은 굉장히 큰 방 하나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그 안에는 화장실도 신발장도 있었다. 방이라는 단어보다는 큰 공간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렸다. 이 공간에서 출입구는 하나였는데, 난 첫 번째 방문자라 그런지 출입문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 쑤노!!”

(미겔이 이쑤시개를 문채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미겔 뒤로는 펩과 후안, 리사가 차례로 들어왔다. 난 친구들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짧은 안부인사와 함께 반가운 포옹을 나누고 나서 그들에게 신발장과 샤워장,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2층 침대지만 코로나 때문에 1층만 이용해야 한다는 것도 설명해 주었다. 원래 테레사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고 있었다. 테레사의 큰 그림이었나 싶었지만, 그마저도 귀찮게 느껴지진 않았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샤워와 빨래 등등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쯤, 또 다른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숙소에 도착했다. 나의 까미노 절친이었던 이네스와 이날부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미하우도 들어왔고, 지난번 ‘카사 데 라스 알마스’에서 함께 지냈던 스페인 아저씨인 ‘프란’도 이날 숙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 가끔 길을 걸으며 만났었던 다른 순례자들도 숙소에 들어왔다. 

 일찍 도착해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적막했던 공간이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하루의 일기를 적고 있을 때, 미겔이 조용히 다가와 내게 물었다.


“쑤노! 타파스 알아?”

(나는 그에게 몇 차례나 내 이름이 순. 호.라고 알려주었지만, 미겔은 받침 발음을 하기 힘들었는지 항상 쑤노라고 불렀다)

“타파스? 그게 뭐야?”


 내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미겔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타파스란 것에 대해 알려주었다. 타파스는 이곳 ‘레온 주’에서 펍이나 음식점에서 술을 시켰을 때, (한 잔 시켰을 때와 한 병 시켰을 때의 타파스 양은 달랐다) 무료로 안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는 문화였다. 음식은 무료로 주지만, 그 종류는 내가 고를 수는 없었고, 그때에 식당이나 펍에서 만들어놓은 음식을 주었다. 

 그런데 그 양이 적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마트 시식 코너에서 볼 수 있는 맛보기 정도의 양이 아니라, 타파스 두어 개 먹으면 배부를 정도 되는 양이었다. 물론 음식만 따로 시킬 수 도 있었기에 맛 또한 훌륭했다. 

 미겔과 펩, 후안, 미하우, 이네스 그리고 군인 출신의 스페인 아저씨와 함께 레온 시내 곳곳의 펍들에서 맥주나 와인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타파스를 먹으며 돌아다녔다. 우린 6군데의 펍과 레스토랑을 돌며 거하게 술과 음식을 먹었는데, 세 번째 펍에서부터는 흥에 겨워 함께 노래를 불렀고, 길거리를 거닐면서 스페인 국가를 부르곤 했다. 물론 난 그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미겔이 부르는 걸 보며 곧잘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신기해 보였는지 미겔은 또 다른 노래라며 알려주었고, 난 또다시 미겔과 친구들이 부르는 걸 곧잘 따라 불렀다. 우린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놀다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미겔의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에 눈이 떠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곳에서 하루 더 있을 계획이었지만, 이네스와 미하우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계속 걷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이곳 청소시간 전에는 나가야 해서 대충 짐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전날 함께 술을 마실 때, 난 이곳에서 2-3일 정도 쉬며시간을 보낼 거라는 말에 친구들은 너무 아쉬워하며 그냥 같이 걷자고 했다. 2-3일이면 우린 이제 못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함께 하자는 친구들의 말이 너무나도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했지만, 걱정하지 말라며 내가 금방쫓아갈 수 있다고 하니 미겔은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 꼭 다시 보자며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멈춰주었다. 그 덕분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있었지만, 이게 그와의 마지막이란 걸 알았더라면 난 그날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섰을 것이다.

 9시쯤 해서 나와보니 미겔과 나, 이네스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출발하고 난 뒤였다. 미겔은 이왕 늦은 거 아침이라도 같이 먹고 가겠다 하여, 우리 셋은 근처 카페에 앉아 빵과 커피를 먹었다. 카페에서 배를 채우며 지난밤 얘기를 한참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10시가 넘어있었다. 미겔이 이젠 가야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꼭 한번 안아주며


“그라시아스 메 아미고” (고마워. 나의 친구야)라며 산티아고에서 꼭 다시 보자는 말과 함께 작별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난 미겔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레온 이후 길을 걷던 중에 왼쪽 정강이 근육 쪽에 염증이 생겨, 난 그전처럼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대로 가면 다시는 친구들을 볼 수 없을 거 같아, 꾹 참아가며 며칠 무리하다 보니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난 내 상태를 친구들과의 단체 SNS방에 다리상태를 알리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진심으로 날 위해줬다. 그들의 예쁜 마음에 내 마음이 따뜻해져 갈 때, 미겔이 내게 보내는 시라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스페인어로 된 긴 글을 찍어 보낸 사진이었는데, 스페인 필기체로 적힌 글이라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옆에 있던 이네스가 미겔이 보낸 사진에 적힌 내용을 종이에 적어 내게 보여주었다. 

 이네스 덕분에 내용을 번역해서 읽을 수 있었는데, 번역된 내용을 읽으며 읽을수록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종이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이날 미겔의 시를 읽으면서 흘렸던 눈물은 내가 이곳에 와서 흘린 두 번째 눈물이었다.






후안, 나, 미하우, 미겔, 까를로스





미겔이 써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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