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장소로 가고 있다.
지난주에 졸업 후 지금까지 내가 만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졸업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고교 동창과의 점심을 제안해서 지금 약속장소로 가고 있다.
이들 둘은 오래전부터 만나왔던 사이라 들었다.
그 약속이다.
약속!
지금의 약속과 내가 은행에 다니고 있었을 때의 그것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지금의 약속은 내가 기다려지고 설레는 모임이지만 옛날 내가 은행에 다니고 있었을 때 약속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때 약속들의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약속들이 기다려지지도 않았고 설레지도 않았다.
어쩌면 부담스러웠고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약속들은 그냥 내가 해결해야만 할 스케줄이었다.
지금 약속장소로 가고 있다.
설렌다.
오랜만에 보는 옛 고교동창이라 설렘이 더 크다.
40년 만의 조우인 듯 싶다.
그때 그 친구와는 참으로 친했었는데ㆍㆍ
그때 그 친구와는 서로 마음이 통했었는데ㆍㆍ
그리고 보니 지금까지 잊고 살았었다.
얼마나 변했을까?
그 친구도 이제 나처럼 중년의 모습이겠지?
내 이런 설레는 마음이 시간을 디디게 하고 있었다.
약속장소까지는 자동차로 20분 거리인데 아직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한 시간이나 남아있다.
그래도 집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조금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한 해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그제부터 찾아온 급작스런 한파 때문인지 도심의 거리는 한가하고 어쩌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북적임 보다 이런 한적함이 나는 더 좋아졌다.
남은 40분의 시간적 여유 틈 사이사이로 고교친구 놈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급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꾸 얼굴을 내민다.
꼭 이런 날은 차도(車道)의 신호등 개수가 늘어나 있다.
차도 온 도로가 신호등 투성인 듯 느껴진다.
꼭 이럴 때 내가 도착하는 횡단보도, 교차로 신호등은 내 도착과 동시에 전부 빨간불로 바뀐다.
이 무슨 머피의 법칙?
살아오면서 나는 자주 머피의 법칙과 마주했다.
이럴 때는 기다려야지 별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양방향 차들이 멈추어 서고 이내 보행자들이 일제히 횡단보도로 쏟아져 들어와 가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교차로 신호등들이 깜빡이며 보행자들에게 30초의 시간을 주었다.
30, 29, 28,27ㆍㆍㆍ
젊은이들은 휴대폰을 보면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지만 연세 있으신 어르신들은 느린 발걸음을 빠르게 걷고 계셨다.
ㆍㆍㆍ참, 이제는 기계들이 인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또 가게 하고 걸음걸이 속도까지 정해주는구나.
신호를 기다리는 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헛돌고 지나갔다.
5,4,3,2,1
기계가 준 보행자들의 시간이 다 되었다.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주어진 30초 시간에 일제히 제 갈길을 갔고 이번에는 기다리던 자동차들이 움직였다.
도심이 제식훈련을 받는 군인들처럼, 감긴 태엽을 풀며 째깍이는 벽시계처럼 착착 맞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보게 될 동기 놈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이 또 머리를 들이민다.
마음이 조급하다.
내 앞의 차들이 순서대로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머릿속으로 상상이 된다.
급한 마음에 발이 액셀 페달을 밟으려 하였다.
그런데ㆍㆍ
자동차 진행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는데 맨 앞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금세 클랙슨을 울리려다 울리지 않고 기다렸다.
나이 들어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기다렸다.
앞 차는 여전히 그대로다.
마침 옆 차선이 비어 있어서 앞 차를 비켜 내가 먼저 지나갔다.
지나면서 앞 차를 슬쩍 보았다.
앞 차 운전자가 휴대폰에 눈을 두고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제야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차를 출발하여 자리를 떠났다.
다음번 횡단보도 앞에서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또 앞 차 운전자가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번에는 내 뒤차가 클랙슨을 울려 앞차가 출발하였다.
요즘 운전을 하면서 쉽게, 그리고 자주 보는 장면들이다.
거의 40년의 세월을 건너뛴 고등학교 동기의 모습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변해 있었다.
중년의 모습을 예상하고 있던 내 눈앞 동기는 노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도 빠지고 목과 얼굴에는 꽤나 많은 주름이 점령하고 있었다.
-내 마이(많이) 늙었지?
하는 동기의 목소리조차 옛날 그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기사 저 친구 눈에 나도 저리 보이겠지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커피 한 잔과 두 어 시간이 둘의 40년 세월을 지웠다.
우리 셋이 앉은 맞은편에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앉았다.
연인으로 보였다.
둘은 처음 커피 종류를 정할 때 짧은 대화를 하였다.
대화라기보다 각자 마시고 싶은 차종(茶種)을 정하는 결정의 말인 듯 보였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서로 각자의 휴대폰에 머리를 숙이고 눈을 두었다.
저러다 말겠지 하는 내 생각은 틀렸다.
그들은 우리가 카페에 있었던 두 어 시간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와 동기 둘도 잠시 어색한 시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서로의 휴대폰으로 눈을 두었다.
사람들은 왜 저럴까?
불과 얼마 전까지 휴대폰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사람들은 왜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휴대폰 보는 것을 더 좋아할까?
답을 구하는데 그리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그러고 있으니까ㆍㆍ
인류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해 왔다.
태고(太古)적 인류에게 무리의 생활은 어쩌면 생존이었을 것이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혼자 사는 인간은 필시 야생의 강한 생명체들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 뻔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덩치 큰 공룡이나 시조새의 공격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조금 더 발전한 인류도 무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을 것이다.
농경사회의 인류는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밭을 일구고 논을 개간할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서로의 힘을 합쳐 함께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하였다.
상부상조하며 생존하였다.
농경사회를 보낸 인류는 공업사회가 되었을 때도 무리를 지어 무리들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성장하였다.
직장동료라는 이름으로 같은 직장으로 출근하고 직장에서는 하루 종일 그들과 함께 일하다가 같은 시간에 퇴근하였다.
기업의 일 대부분을 사람의 손과 사람의 두뇌가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회식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퇴근 후에도 술잔을 앞에 두고 그들과의 시간을 연장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 사람들은 말했다.
그렇지 못하고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땡돌이, 땡순이라 부르면서 괄시하고 따돌림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인류가 시작되고부터 350만 년간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우러지고 부대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들의 숙명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렇지 않다.
구태어 무리를 이루지 않아도 생존을 위협받을 일이 전혀 없다.
혼자 있는 사람을 공격할 사나운 맹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태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이룰 일들도 지금은 거의 없다.
인간들의 일 대부분은 기계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렉트가 논을 갈고 포클레인이 무거운 것을 들고 불도저가 땅을 판다.
어려운 계산은 컴퓨터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척척 해낸다.
인간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350만 년 동안 인간들과의 동거가 얼마나 불편하였는지 스스로 깨닫고 이제는 그 한계를 느끼고 있는 듯싶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불편하고 내 에너지를 갉아먹는지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듯싶다.
나는 동그라미인데 어떤 이는 세모, 어떤 이는 정사각형, 누구는 직사각형, 또 누구는 마름모꼴ㆍㆍ
동그라미인 나는 늘 그들의 날카로운 날에 베이고 찢기면서 상처를 받아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상처를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 여기고 참으면서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괴롭혀왔다.
어느 날 문득 휴대폰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휴대폰의 시대를 넘어 AI시대가 왔다.
휴대폰과 AI는 사람들의 모습을 얼른 알아차리고 동그라미인 사람에게 절대 세모, 네모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사람과 호흡을 맞추고 그에게 세모, 네모가 되어라 채근하지 않는다.
자주 사람들이 큰 동그라미를 좋아하는지, 작은 동그라미를 좋아하는지 까지 알아내서 눈으로 보여주고 귀로 들려준다.
사람들이 오늘은 그만하겠다고 하면 금방 그 뜻을 알아차리고 하던 일을 멈추고 사람들을 다그치고 채근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그것도 아주 정확한 팩트의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한다.
휴대폰과 AI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수고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영상은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내일, 모레 계속 새로운 영상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사람들은 이를 알고리즘이라 이름을 붙이고 좋아하고 있다.
숫제 입 안의 혀다.
이제야 인간들은 인간관계에서 해방이 되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 연인의 관계라도
아무리 막역한 친구의 관계라도
천륜의 부모자식의 관계라도 휴대폰, AI처럼 순도 100%의 편안함을 주지 못하니까 구태어 사람들은 사람을 찾지 않는 듯싶다.
씁쓸하다.
이러다가 사람들이 AI와 결혼하고 사람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이러다가 사람들이 사람에게 상처받은 자신을 AI한테 위로받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집에서 나올 때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나오더라도 휴대폰을 두고 나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들어가 들고 나오는 사람들 속에 나도 들어가 있다는 것이 씁쓸하다.
사람들이 휴대폰과 사랑(?)에 빠진 것은 그동안의 그들 인간관계에서 지친 탓일까 아니면 휴대폰과 AI의 진화 때문일까?
이들에게 완벽한 인공지능이 장착되기 전에 알고 싶다.
인공지능이 장착된 AI가 내 이런 물음에
-더는 궁금해하지 마라.
지금부터는 우리 AI들이 너희 인간들을 지배할 터이니ㆍㆍ
라고 답할 것 같아 무섭고 두렵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느니 AI가 주는 달콤한 편안함에 익숙할 것 같아 무섭고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