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의 시작과 끝을 선생님 중 누군가가 교무실 창문에 매달린 종(鐘)을 쳐서 알렸다.
학교에서 목이 마른 아이들은 긴 끈에 묶여 운동장 구석에 자리 잡은 둥그런 우물에 빠져 있는 두레박을 이리저리 흔들어 담긴 물을 마셨고 아침조회 시간 교장선생님은 나팔처럼 생긴 손 마이크를 직접 손에 들고 긴 훈화의 말씀을 하셨다.
학교에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당연히 수도도 설치되지 않았다.
3학년 무렵 사회시간에 신호등에 관한 공부를 하였을 때였다.
빨간불은 서시요, 파란불은 가시요 하며 선생님이 열심히 신호등을 설명하셨지만 그 말을 알아듣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신호등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신호등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아이들은 몰랐다.
선생님은 결국
"느그들 읍내 길가에 가면 이렇게 세 개의 눈을 가진 토제비(도깨비)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저 앞에서는 무조건 서야 하고 길을 건넬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건너야 한데이
여기서 만치로 느그 멋대로 길을 건너다가는 큰일 난다 이 말이다.
느그들 알았나?"
라고 신호등 수업을 마쳤다.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인근 야산으로 가서 나뭇가지와 떨어진 솔잎을 주어와 쇠로 만든 둥그런 난로에 불을 피웠다.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이미 죽어 썩어가는 나무(아이들은 그런 나무를 썩빼기라 하였다)와 솔잎(소깝)을 캐내고 주워 교실 앞 복도에 쌓아 놓았고 선생님은 많이 주워온 아이들을 칭찬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추위에 손이 얼어 피가 흘러내렸는데도 손에서 피가 나는 그 아이도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아이들도 그저 그러려니 생각 없이 피가 나는 친구들의 손을 바라보았다.
많은 아이들이 언 손에서 피를 흘리고 다녔기 때문에 겨울이면 손에 피가 나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에 올 때 집을 나서면서부터 아버지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만 하였다.
학교에 간다며 책 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는 아이들이 아버지는 못마땅하셨는 것이었다.
농번기 때는 부엌에 있는 부지깽이의 손도 빌려야 할 만큼 일손이 부족한데 제법 일을 도울 만한 자식들이 학교에 간다며 가버리고 나면 가뜩이나 부족한 일손이 더 모자랐던 것이다.
어떤 날은 당신의 자식이 수업을 받고 있는 교실 문을 왈칵 열고 들어와 아들, 딸 손을 낚아채 가버리는 아버지도 계셨다.
말리는 선생님께 아버지는 그러셨다.
"선상님요, 우리 아는 지금 한가하게 핵교(학교)에서 공부나 하고 이래 있을 시간이 없심니더.
오늘 모도 숨가야 되고(모내기도 해야 하고) 소죽도 끓이야 된다 이말입니더.
야 델꼬 가야되이끼네 그리 아시소.
선상님 미안쿠마"
선생님은 그래도 그날 그 아이 생활기록부에 '조퇴'라 기록하지 않으셨고 수업을 마치고 그 아이 집으로 가서 아버지를 설득시키셨다.
2~30년 후에나 일어날 아이의 장래보다 아버지들 눈에는 오늘 당장 못자리 한가운데서 쑥쑥 자라고 있는 피가 더 신경이 쓰였고 하루 종일 일하고 외양간에 들어간 소의 홀쭉해진 배가 먼저 들어왔다.
한 반 40여 명의 아이들 중 가방에 책을 넣어 학교에 오는 아이는 두어 명 남짓 하였는데 그나마도 졸업한 형이 쓰다 물려준 것이었다.
대부분은 천으로 된 보자기를 가방으로 썼는데 아이들은 가방 대용의 그 보자기를 '책보'라 하였다.
책보는 맨 밑에 도시락, 그 위에 반찬통 그리고 그 위에 그날 수업이 있는 책과 공책을 얹고 싸서 남자아이들은 어깨에 대각선으로 매고 여자아이들은 허리춤에 매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거의 십리길(4km)이었는데 오가는 길이 포장이 되지 않은 비포장 길이라 길 군데군데에 툭툭 튀어나와있는 칼돌들이 얇은 고무신을 신은 아이들의 발을 어지간히 괴롭혔다.
등교, 하굣길의 아이들은 조용하게 학교에 가지를 않았다.
술래잡기를 하며 서로 잡고 잡히고 하면서 천방지축으로 뛰며 오갔는데 그럴 때면 책보자기에 4층으로 쌓인 책과 공책의 영역에 반찬이 침범하기 일쑤였다.
이때의 아이들 반찬이래야 거의가 국물이 있는 김치와 생고추, 생된장이었는데 이런 반찬들이 하얀색 책과 공책의 색깔을 기어이 자신의 색깔과 같은 뻘건색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업을 하다가도 지금처럼 비가 많이 오시는 날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는 아이들부터 하나씩 집으로 돌려보냈다.
자칫 계속해서 학교에 붙잡아 두었다가 하천에 물이 불어나 아이들이 그 하천을 건널 수 없게라도 되면 선생님으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3학년 때의 일이었다.
1개의 학급이 4개의 분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나는 그때 3 분단을 책임지는 분당장을 맡았었다.
선생님은 회장과 부회장, 4명의 분단장에게 동그란 휘장을 가슴에 붙이게 하여 그들이 학급의 간부임을 알렸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 휘장을 자랑스럽게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 가슴에 달고 다녔고 어떤 아이들은 부끄러워 숨기고 다니다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하였다.
내가 있던 3 분단에 권 XX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 마을과는 꽤 떨어진 마을에 사는 친구였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였다.
그 아이는 거의 매일 학교에 올 때 아버지께 혼이 났고 어떤 때는 그 아이 얼굴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올 때도 있었다.
그 친구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어서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 아버지의 일손을 도와야 혼이 덜 났기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그 친구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3학년이면서 한글도 잘 읽지를 못하였고 숫자는 1~10까지를 겨우 썼다.
어쩌면 쓰는 것이 아니고 그렸다고 해야 맞겠다.
그날 수업은 구구단 중 2단을 외우는 시간이었다.
구구단 수업은 일주일 전에 시작을 하였던 터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2단의 구구단은 술술 외웠다.
그런데 유독 한 아이
권 XX은 2X4=8에서 멈추어 버렸다.
2X5=10은 그 아이 입에서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선생님의 회초리와 개별학습 등 그 어떤 방법도 그 친구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하루 수업이 끝날 때쯤에 급기야 선생님이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오늘까지 분단장인 니가 권 XX 구구단 2단을 다 외우게 하고 집으로 가거라.
만약 내일 선생님 앞에서 권 XX이 구구단 2단을 외우지 못하면 분단장 니가 내한테 혼날 줄 알아라
알았나?"
하셨다.
"예, 알겠심더"
대답은 하였지만 내 목소리는 기어 들어갔고 나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선생님도 못하시는 일을 와 내한테 맽기시노?'
수업을 마친 아이들과, 나에게 어려운 숙제를 맡기신 선생님이 빠져나간 교실은 일순간 적막이 맴돌았다.
권 XX과 나 둘만이 덩그러니 교실에 남았다.
적막감은 이내 무서움과 조바심을 데리고 와서 옆에 앉혔다.
늘 공부를 해왔던 교실이지만 오늘은 낯설게 느껴지고 그 낯설움 뒤에 무서움이 무섭게 서 있었다.
"XX아 우리 퍼뜩 2단 외우고 집에 가자.
그래야 니도 느그 아부지한테 덜 머라캐이고 나도 해빠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다 아이가"
내가 말하였지만 그 친구는 이미 지금 구구단이 문제가 아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2X1=2 ~ 2X9=18의 구구단 보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펴고 자신을 노려보고 계시는 아버지 얼굴이 덮어 버린 듯 보였다.
"종열아, 나는 죽었다 깨나도 구구단 이거 오늘 중으로 못 외운다.
그라이끼네 내일 우리 선생님한테 맞아 죽더라도 토끼뿌자(도망가자)
내사 내일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에 오늘 우리 아부지한테 먼저 맞아 죽지 싶데이~"
사색이 된 친구의 얼굴에 절실함이 보였다.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맞은편 회색 건물 교실에서 6학년 형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공부하는 교실 밖에 초침 없는 동그란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3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학교 곳곳에 겨울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제법 따사로움을 내어 주던 동그란 쇠난로는 이내 식어 차가움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그라마 XX아
우리 이라자.
저기 시계가 5시 될 때까지 한번 외워보자.
오늘 끝까지는 다 못외워도 하는데 까지 해서 내일 그래도 2X7=14까지만 하믄 선생님이 덜 머라카실꺼 아이가?
알았제?"
XX은 나의 말에 짧게 응이라고 대답을 하였지만 괜히 힘 빼지 마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들렸다.
2.5=10.
2.6=12.
2.7=14
그러나 XX의 구구단 암기는 커다란 암석을 만난 터널공사 보다 더 디뎠고 XX과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정신이 몽롱하였다.
"야들아
느그 지금 교실에서 뭐 하노?
와 집에 안 가고 이 시간까지 여서(여기에서) 이카고 있노 말이다"
우리가 엎드린 책상을 막대기로 탁탁 치시는 선생님의 소리에 놀라 일어나 앉았지만 이미 학교는 어둠 속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교실 뒷 산 어디에서는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조금 전 맞은편에서 공부를 하던 6학년 형들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XX와 내가 책상에 엎드린 채로 깜빡 잠이 들었고 순찰을 돌던 당직선생님이 우리를 발견하시고는 깨우셨던 것이었다.
큰일이다.
집에 가야 하는데 2년 넘게 집에서 학교를 오갔지만 이렇게 밤에 다녀보지는 않았던 나는 겁부터 덜컥 났다.
혹여 선생님이 집까지 자전거로 데려 주실까?
아니면 XX이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미안한 마음에 나와 우리 집까지 같이 가 줄까?
그것은 100% 내 생각이었고 내 착각이었다.
선생님은 둘 다 조심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만 남기고 당직실로 돌아가버리셨고 XX은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집에 도착하였다면서 나한테 손만 한번 흔들어주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온전히 혼자였다.
조금 전까지 들리지 않던 밤바람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리고 하늘의 초승달 모습이 씩 웃는 마귀할멈의 입꼬리로 보였다.
우리가 처음 학교에서 나올 때 뒷산 어디선가 울기 시작하였던 부엉이는 내 머리 바로 옆에서 울어대었다.
'부엉이 밑에는 범이 따라다닌다고 우리 할매가 그러셨는데.......'
내 눈에는 덩치가 산(山)만하고 눈에 퍼런 불을 뚝뚝 흘리며 부엉이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범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도 이대로 XX집 마당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XX집 마당을 나와 우리 마을이 있는 곳으로 잰걸음으로 걸었다.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학교에서 우리 마을 쪽으로 오는 길 모퉁이에 조그맣게 지은 기와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 기와집에는 상여(喪輿)가 보관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대낮에도 그곳을 지나갈 때에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 상엿집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뛰어서 지났는데 지금 나는 온전히 혼자서 이곳을 지나야 했다.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이 밤에.......
마음을 정리하자.
어차피 나는 지금 이곳을 지나야 하고 지금 나와 동행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오늘 밤에는 없을 것이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우선 상엿집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헐겁해진 책보자기를 단단히 다시 묶어 어깨에 메었다.
길에 버려진 노끈을 주워 까만 고무신을 위 아래로 단단히 묶었다.
뛰자
죽도록 뛰자
대신에 뒤는 절대 돌아보지 말자.
숨을 길게 몰아쉬고 뛰었다.
눌려있던 용수철 처럼 튀어서 앞으로 나갔다.
뛰면서 마음속으로 학교 교가를 불렀다.
그런데 내 뜀박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고 나는 이내 길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내 뜀박질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누군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가 쭈뼛서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울어대던 부엉이도 울음을 그친 듯 온 사방이 고요하였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누군가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따라왔는데..........
다시 뛰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차도(車道)에 인기척이라고는 내 발에서 나는 고무신 소리와 다 먹은 도시락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숟가락,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전부였다.
"딸가락 딸가락......"
내 어깨에 매여진 책보자기 속의 숟가락,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는 밤 메아리가 되어 더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소리가 누군가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따라오는 소리로 들은 것이었다.
이미 환청을 경험한 어린 나는 급기야 선망까지 보고 말았다.
내가 방금 막 지나온 그 상엿집 대문 앞에 하얀 소복을 입고 허리까지 내린 머리를 풀고 나를 보고 있는 귀신을 본 것이다.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 일인데 도무지 다리가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았다.
아직 곳곳에 겨울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3월 초의 날씨인데도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내 입에서는 연신 '집에 가야 된다, 집에 가야 된다'만 내뱉고 있었다.
내 의지와 내 말과는 상관없이 내 정신은 점점 혼미해져 갔고 내 다리는 이제 일어날 기력을 완전히 잃었을 즈음 저쪽 차도 끝에서 호롱불 두어 개가 흔들거리며 내게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보이는 저 호롱불이 어쩌면 내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선망일 수 있겠다 생각을 하였다.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그 두 개의 호롱불은 점차 가까워져 왔고 이윽고 사람의 소리도 들렸다.
엄마 목소리였다.
나는 거의 길바닥을 기다시피 엄마 쪽으로 다가갔고 엄마가 나를 발견하셨다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이후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엄마와 작은 말다툼을 하였다.
'어제 나는 기절을 한 것이 아니고 잘 시간이 넘어서 잠이 든 것이었고 내가 벗어낸 속옷에 한 방울의 지린 오줌도 없었다'라고 하였다.
'니가 어제 느그 엄마 등에 업히가 집에 왔는데 느그 엄마가 니 옷을 전부 벗기는데도 니는 몰랐고 니가 벗은 빤수와 바지가 오줌에 다 젖어 있었데이'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고모가 놀리듯 그러셨다.
나를 그렇게 골탕 먹인 권 XX은 지금은 경기도 김포에서 중소기업을 하면서 가끔 초등학교 동기회에 꽤 큰 금액을 발전기금으로 찬조를 한다고 들었다.
행복과 성공은 꼭 성적순만은 아닌가 보다.
XX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XX아
니 요새 구구단 몇 단까지 외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