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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Jul 07. 2023

첫 출근 기행기

나의 첫 직장은 ㅇㅇ은행이었고 첫 발령지는 그 은행 울산지점이었다.

지금은 시중은행이 되었지만 그때는 국가에서 꽤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국책은행이었다.


1981년 11월 9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집 마루에 놓인 노란 봉투 하나를 보았다.

봉투 오른쪽 위에 ㅇㅇ은행로가가 선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로고 밑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라며 이 봉투가 본점에서 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열어본 봉투에는 11월 11일까지 울산지점으로 부임을 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해 10월 초에 미리 합격통지서를 받았던 터이라 이제 곧 발령장이 올 것이라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 봉투하나로 나는 너무 급작스런 변태(變態)를 하였다.

이틀 사이에 학생신분에서 사회인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음 날 나는 학교로 가서 담임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내일부터는 등교를 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더니 선생님은 나에게 손을 건네어 악수로 축하의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과 악수를 하다니~~

학교에서 눈조차 마주치기가 두려웠던 선생님의 손을 잡는 순간 내가 이제 사회인이 되었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11월 11일

태어나서 여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울산이라는 곳에 혼자 가기가 조금은 무섭고 겁이 났다.

내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가 첫날은 같이 가주겠다며 나를 안심시키셨다.


그날 은행으로 출근을 하려고 하는 내 복장은 어제 학교에 입고 갔던 그것과 똑같았다.

교련복과 하얀색 운동화

3년 동안 내 머리 위에 얹혀있던 학생모자는 쓰지 않았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짧은, 그것도 아주 짧은(뒤와 옆은 빡빡머리, 앞 머리는 3cm) 스포츠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도착한 고속버스 터미널

영혼 없이 그저 쳐다만 보았던 달리는 고속버스를 가까이에서 본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때 내게는 그곳이 신기루였고 별천지였다.


더군다나 조금 있다 내가 저 버스를 탄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매표룰 하는 누나들의 손놀림이 엄청 빠르고 민첩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난생처음 올라타 본 고속버스


세상에 ~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등굣길에 타고 다녔던 콩나물시루 시내버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 넓은 앞 뒤 간격과 푹신한 의자

그 의자 옆에는 이어폰만 꽂으면 라디오 방송까지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여인숙에서 생활을 하다 5성급 호텔에 온 기분~


나는 고속버스에 좌석번호가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주저하고 있는 나와 어머니를 우리가 앉을 좌석에 안내해 주던 제복을 입은 안내양(그때는 안내양이라 불렀다) 누나가 꼭 천사처럼 느껴졌다.


차가 출발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안내양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과 도착예정시간과 버스 이용에 관한 안내방송을 하였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본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대구에서 울산까지는 꼭 1시간 30분이 걸렸다.

드디어 도착한 울산


지금껏 수학여행 때를 제외하고 대구를 거의 벗어 나 본 적이 없었던 내 눈에 울산은 해외 어느 나라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와 내가 타고 왔던 택시기사 아저씨가 누워있던 미터기를 손으로 일으켜 세우면서 이곳이 ㅇㅇ은행 울산지점이라며 정문 앞에 차를 세우셨다.

우리가 내린 그곳에는 그저께 받은 노란 봉투에 새겨졌던 것과 똑같은 로고가 박힌 3층짜리 건물이었고 ㅇㅇ은행 울산지점이라 쓰여 있었다.


한 번도 문턱을 넘어서 본 적이 없었던 은행이라는 이곳

그때의 나는 내가 앞으로 이곳에서 3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천직처럼 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곧 닥칠 은행직원들과의 첫 만남이 더 걱정이 되어 입에 침이 마르고 살짝 손이 떨렸다.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잠시 기다려 주셨고 내가 다시 발자국을 옮기는데 꽤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맨 처음 우리 모자(母子)를 맞이해 주신 분은 청원경찰 한ㅇㅇ씨였다.

"어서 오이소

어떻게 오셨습니꺼?"


청원경찰분은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하셨지만 내 눈에는 꼭 진짜 경찰로 보였고 이미 나의 입은 얼음을 한 입가득 머금은 듯 얼어 있었다.

물론 대구에서 발령을 받고 오늘 이곳으로 출근을 하였다는 말은 어머니가 하셨다.


청원경찰분은 우리를 2층에 데려다주시면서 우리 모자 앞에 선 분께 오늘 발령을 받고 첫 출근을 한 신입행원 ㅇㅇㅇ라고 말씀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다시 가셨다.

우리를 반갑게 맞은 분 책상 맨 앞 명판에 '차장 주ㅇㅇ'라 쓰여 있었고 나는 이 분이 은행에서는 꽤나 높은 분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 차장님은 어머니와 간단한 인사를 하시고는 이내 나를 보고 '지금 ㅇㅇ군이 입고 온 복장으로는 근무를 할 수 없으니 이길로 집으로 가서 양복도 맞추고 구두도 맞추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정식으로 다시 출근을 하라'라고 하셨다.

잊어버리지 말고 은행 앞 어느 곳에 있는 도장방에 가서 업무용 도장도 새겨 오라고도 하셨다.


나를 쳐다보던 차장님의 그 눈빛이 따스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나는 이내  'ㅇㅇ라사'에서 감색양복을 맞추었고 'ㅇㅇ슈즈살롱'에 들러 고동색 구두를 맞추었다.


이후 남은 5~6일을 나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친한 급우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는 일에 시간을 다 썼다.

취직턱을 낸 것이다.


드디어 1981년 11월 16일

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는 양복과 구두를 맞춰 입고 은행 옆 골목에 있는 도장집에서 업무용 도장을 새겨 정식으로 출근을 하였다.


까맣게 탄 얼굴에 스포츠머리

입은 양복과 구두는 언밸런스, 그 자체였다.

내가 봐도 어색하고 어색하였다.


차장님은 이런 나를 응접실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앉아 계시는 분께 인사시켜 주셨다.

90도 폴더 인사를 드린 나를 보신 그분은 "그래, 열심히 해"라고만 하고 이내 다시 산더미 같은 서류에 결재를 하셨다.


지점장님이셨다.


그날 이후 울산지점에 있는 3년 내내 나는 그 지점장님과 그 어떤 대화도 하지 못하였다.

그때의 지점장님은 신입행원들은 감히 근접할 수 조차 없는 분이셨던 것이었다.


차장님의 손에 이끌려 내가 처음 가 본 일하는 곳


사방을 칸막이로 막은 곳이었다.

칸막이 앞 유리로 돈다발 하나가 겨우 들락일 수 있을 만한 구멍이 하나 있었고 그 유리 앞에 '출납실'이라는 창구표시판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턱 숨이 막혔다.

내가 18년 내내 보아왔던 돈 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이 10 다발씩 묶음의 형태로 그곳에 앉은 남자직원 의자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차장님이 나를 소개하자 그 돈을 손으로 쓱 밀어내고 일어선 남자직원이 반갑다며 악수로 나를 맞으셨고 옆자리에 있던 여자직원분도 살짝 고개를 숙여 반갑다는 말로 나를 맞아주셨다.

남자직원분이 출납주임님이시고 여자직원분이 수납직원님이라고 그날 저녁에 누군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출근 첫날

나는 하루종일 출납실에서 돈 세는 방법을 배웠다.

천 원권 한 다발을 나에게 건네신 수납주임님이 나에게 돈 잡는 법, 넘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만 선척적으로 심한 왼손잡이인 나는 결국 다른 왼손잡이 주임님께 돈 세는 방법을 특별연수까지 받아야만 하였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오후 4시 30분이 되었다.

 (지금은 은행폐점 시간이 오후 4시이지만 그때는 4시 30분이었다)

청원경찰분이 기역자(ㄱ)처럼 생긴 쇠막대기로 셔트문을 내리셨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오전 9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4시 30분에 칼퇴근을 하는 은행원들이 참으로 부럽다고 생각하였던 나의 착각은 딱 그날까지였다.

아침에 내가 인사하였던 수납주임님은 그날 밤 11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셨고 그나마 통행금지 때문에 여자 수납주임님을 먼저 보내드리고 출납주임님은 새벽 2시가 넘어 숙직실에서 당직자들과 함께 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다음날 들을 수 있었다.


고객님들이 작성한 전표금액과 은행원들이 작성한 장부의 금액 100원이 맞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선배 직원 전부가 객장 앞에서 모이셨다.

나를 소개하려고~~

그때 모이신 분들을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50명은 되어 보이는 듯하였다.


내 첫인사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ㅇㅇ상업고등학교 제 3학년 1반 ㅇㅇㅇ입니다.

아직 학생의 땟물이 가득하지만 무엇이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다행히 선배직원분 모두가 따뜻이 나를 맞이해 주셨고 나의 인사말을 들으신 차장님은 앞으로는 ㅇㅇㅇ학교 누구라고 자신을 소개하지 말고 ㅇㅇ은행 행원 누구라고 소개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처음 보는 것 투성이었다.


수북이 쌓인 돈바달

백지였던 종이가 내 눈앞에서 금세 2천만 원권 자기 앞 수표로 발행되어 변신되는 것

47+52=이라고 누르면 99라고 금세 대답을 해주는 전자계산기

은행업무를 보러 오시는 고객분들을 창구가 아닌 객장 안에서 바라보는 일

그 고객분들이 가끔 나에게 불러주시던 아저씨라는 호칭

선배님들이 불러주시던 ㅇㅇ주임이라는 호칭


엊그제 일처럼 내 머리에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있는데 벌써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 버렸고 나는 이제 ㅇㅇ은행 직원이 아닌 고객으로 가끔씩 그 은행에 간다.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던 차장님과 짧게 열심히 하라고 하셨던 지점장의 부고소식은 벌써 10여 년 전에 보고 들었다.


그제 아침에 문득 내 첫 발령지가 생각나서 그곳으로 차를 몰아서 가 보았다.

그때처럼 고속버스는 타지 않았지만 멋진 제복을 입고 안내방송하던 안내양 누나는 지금은 버스에 없을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어리바리하던 나를 가만히 내려 보던 3층건물은 아직 그대로 있었지만 그 은행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자리에는 대형 의류판매점이 대신 그 건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 큰소리로 인사하던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선배직원들 중 꽤 많은 분들이 벌써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도 여러 차례 들었다.


1981년 11월 16일 그날과 2023년 7월 오늘의 꼭짓점은 서로 맞닿아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는데 세상은 참으로 많이도 변하였다.

없어지고 생겨나고 변해지고ㆍㆍ


오늘 문득 내가 첫 출근을 하던 그때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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