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운명학에 관심이 많으셨던(어쩌면 맹신을 하셨던) 어머니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나의 사주를 봤다고 하셨다.
나의 생년월일, 내가 태어난 時를 물어보신 그분은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셨다.
" 야는 뉑죄(나중에)분명히 돈으로묵고(먹고) 살낍니더"
내 나이 마흔이 넘었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내가 큰 부자가 될 것이라 생각을 하였고 지금도 그리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내 평생직장이었던 은행은 어쩌면 돈과 가장 밀접한 직장이었고 나는 젊은 날 전부를 은행에서 주는 월급으로 먹고살았으니 내 사주를 봐주신 그분은 나의 미래를 정확히 맞추셨으나 어머니는 돈으로 먹고 산다는 말을 당신의 아들이 큰 부자가 될 것이라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다.
내가 처음 은행에 입행해서 들어가 본 곳이 출납실이었다.
그때 출납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10평 남짓 되는 그곳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닥과 책상아래위에 돈으로 쌓여 있었다.
내 평생 보았던 돈보다 수십, 수백 배의 돈을 단 몇 초 만에 보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와 돈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리( 지금의 팀장 )가 되기 전까지 나는 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을 돈과 함께 지냈다.
내가 출납주임을 하였을 어느 지점은 현금보유한도가 10억 원이 넘었다.
은행이라고 해서 금고에 현금을 무한대로 보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금고에서 잠을 자는 현금은 무수익성자산이라고 해서 현금보유한도를 정해놓고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일시적인 초과는 허용하였다 )
또 너무 적게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고객이 돈을 찾으려 왔는데 현금이 없어서 지급하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현금보유한도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때의 나로서는 돈이라는 것은 참으로 귀찮고 성가신 것이었다.
지금처럼 신용카드, 모바일이체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그때
상가로 이루어져 있었던 지점 주변상권 상인들 가게로 수시로 현금이 들어왔고 상인들은 수시로 그 현금을 은행에 입금시켰다.
어떤 날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보면 창구 텔러들이 출납으로 넘긴 돈이 바닥에 가득 깔려 있었는데 그 돈을 본 나는 방금 먹은 점심이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출납으로 들어온 돈은 저녁 마감시간이면 어김없이 10억 원을 넘겼고 보유한도를 넘긴 나는 그것이 스트레스였다.
만 원권 1묶음(1천만 원) 10개(1억 원)를 안고 출납에서 금고로 가는 내내 돈 특유의 냄새가 내 코를 찔렀고 그 냄새는 코를 지나 나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저녁에 현금의 현재 보유금액(은행에서는 그것을 시재라 하였다)을 조사하는 나는 내내 조마조마하였다.
자칫 10억 원이 넘어 버릴까 걱정이 돼서였다.
그런데 어김없이 금고에 들어간 돈이 15억 원으로 카운트가 되었다.
'하아~
이거 큰일이다.'
그렇게 보유한도를 넘은 5억 원은 정사(지폐의 재사용 여부를 가리는 작업)라는 작업을 해서 늦어도 그다음 날 한국은행으로 현송을 하였다.
그 정사의 작업은 지점 내 전 직원을 동원해야 가능했는데 다른 업무(대출업무, 당좌업무, 신용카드업무 등)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일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출납의 업무는 완전히 외적이고 성가신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 이들에게 미안하였던 그때의 나는 내 사비로 자주 음료수를 돌리곤 하였다.
1984년도 어느 달로 기억을 한다.
막 군전역을 하고 부산에 있는 번화가 어느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첫 담당업무가 출납업무였다.
그 지점은 부산의 번화가 서면로터리에 위치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 현금통화량이 매우 많았다.
그런 지점이라 직원 전부가 출납을 담당하기 꺼려하였는데 마침 군을 제대한 젊은 친구가 이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온다고 하니 옳다구나 싶어 나에게 출납업무를 맡긴 것이었다.
그 지점의 현금보유한도는 17억 원이었다.
그날도 하루 업무를 마치고 현금보유금액의 일치여부를 계산하였는데 딱 5백만 원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당시 대구의 24평형 아파트(물론 신규 아파트는 아니고) 한채 값이 대략 6~7백만 원 정도 하였으니까 그 모자라는 금액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 금액이 너무 크기에 나는 내가 계산을 잘못하였거나 현금파악을 잘못하였으리라 생각을 하고 두 번, 세 번을 다시 해보았다.
물론 그때까지 걱정되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경험적으로 이런 경우 둘 중 하나의 이유로 금방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틀린 것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가끔 귀에 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다시 차리려 객장에 있는 커피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금고로 가서 차근차근 잠자고 있는 돈의 현재량을 세어 보았다.
좀 전에 파악한 것과 동일하게 나온다.
덜컥 겁이 났다.
당시 규정으로 당일 시재 과부족액이 1백만 원이 넘으면 지점장이 직접 본점 검사부로 보고를 해야 했다.
그때의 지점장님은 어린 행원에게는 거의 神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 일을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겁이 났고 하루아침에 아파트 한 채가 날아가는구나 싶은 마음에 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담당 대리님한테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 보고를 받은 대리님은 얼굴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농담을 하셨다.
"이 주임
내가 그 원인을 찾아주면 모자라는 금액의 반을 줄 수 있어?"
' 대리님~
물론 드리지요.
드리고 말고요 '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대리님 등 뒤에 섰다.
그때 담당 대리님의 어깨가 태산처럼 크게 느껴지고 악당에게 당하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난 마징거 Z처럼 보였다.
대리님이 물으셨다.
"이주임
시재파악을 몇 번 해봤노?"
"세 번 했어예
그런데 세 번 모두 같이 나왔어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그런데 그 대리님은 조금 전 내가 찾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틀린 시재를 찾으셨다.
금고에 있는 돈다발은 확인하지 않고 출납실 주변을 찾으시는 것이 아닌가?
내 설합을 다시 열어 바닥을 보시고(돈이 자주 설합에서 넘쳐 뒤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동전 산찰기 주변을 살피더니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지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다.
대리님은 태연하였지만 나는 속이 탔다.
더 이상 침이 말라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어 2층 구내식당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는 내내 화난 지점장님의 얼굴과 24평형 아파트가 눈에 아른거렸다.
식당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출납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헉!!!!!
내 자리에 앉은 대리님 앞에 5천 원권 한 다발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꼭 반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 계단에서 내 파란색 넥타이는 슈퍼맨의 망토가 되었고 나는 날아서 출납실로 갔다.
"대리님~
어째 된 일입니꺼?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왔어예?"
대리님은 출납실 바닥 구석에 있던 조그마한 등산용 가방을 가리켰다.
그때 자칫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하였다.
그렇게 찾은 5백만 원을 내 앞에 두고 있으니까 두어 시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 지점은 매일 길건너에 있는 전화국(지금의 KT)으로 파출수납을 나갔는데 그날은 그 전화국에 수납된 현금이 너무 많아 현수송가방에 전부 담지 못하고 전화국에서 준 등산용 가방에 5천 원 한 다발을 따로 담아왔고 파출수납을 다녀온 그 직원이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하였는데 마감이 바쁜 내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대리님은 보시지도 않고 이런 일을 우애 알았어예?"
내가 대리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주임!
모든 세상 일이라는 것은 말이야 바로 답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그 주변을 다시 보면 반드시 답이 거기에서 나오는 법이야.
그렇게 했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그 문제는 답이 없는 것이야"
그때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잘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알랭들롱이 그렇게 잘생기고 리처드기어가 그렇게 잘 생겼을까?
그날 퇴근길에 나는 5백만 원 반 2,500,000원에서 0자 세 개를 빼고 2,500원짜리 짜장면을 대리님께 사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