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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Nov 09. 2023

1963년생

나는 1963 생이다.

태어나고 보니까 아찔하다.

13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6.25 전쟁을 겪었을 것이고 2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자칫 일제 강점기를 겪었터이니 말이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해에 태어나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고 일본이라는 異민족의 탄압도 받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그러나 36년간의 식민국 생활과 3년의 전쟁 흔적이 만들어 낸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일제의 잔상과 가난이라는 부산물(副産物) 운명처럼 가슴에 안고 머리에 이고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57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베이비부머 첫 세대로 하고 63년에 태어난 우리를 그것의 마지막세대라 하였다.

6.25 사변 때 많은 국민들을 잃어버린 국가시책으로 어째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낳아진 것 같아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리고 보니 나는 5남매이고 내 친구 병규는 9남매이다.


내가 말을 배우고 썼을 때 내가 쓰고 있는 말이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썼던 말이 너무나 많았다.

도시락을 또라 불렀고 전구를 다마라 하였으며 양동이를 다라이라 하고 바지를 주봉이라 하였다.

얼마 전까지 주유원이 '기름 얼마나 넣어 드릴까요' 하면 나는 '이빠이요' 라 대답하였다.

이렇게 말을 한 것이 어디 한두가지랴.


나는 내가 매일 겪고 있는 가난의 현실이 세상 모든 나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오늘 쌀이 없다는 어머니 말씀에 그저 오늘은 죽을 먹어야겠구나 생각하였고 아직 벼 수매를 못해 기성회비를 못주겠다고 하는 아버지 말씀에 그저 오늘은 선생님께 야단 좀 맞겠구나 생각하였다.


태어나던 그해 5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 대통령이 내가 죽을 때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인 줄 알면서 자랐다.

그해 부산이 경남 부산시에서 부산직할시가 되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존 F케네디 대통령이 현직의 자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쓰러지기도 하였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당신의 아들, 딸들의 미래를 위한 학업보다 당장의 농번기 일손에 우리를 더 필요로 하였고 억지로 간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외우지 못한 친구들은 선생님께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기도 하였다.


교과서에서는 북한군인들을 늑대의 형상한 사람으로 그렸고 북한 국민들은 그들로부터 매를 심하게 맞는 양과 토끼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국민학교 때 나는 북한사람들 얼굴은 빨간색인 줄 알았다.

깊은 산속 어디선가에서 가끔 북에서 날아온 삐라가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그것을 선생님께 갖다 주고 칭찬을 들었고 어떤 아이는 그것을 땅에 묻었다.


운명이라 여기고 숙명이라 여겼던 가난이란 것에 대한 큰 변곡점이 우리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1970년) 즈음에 갑자기 찾아왔다.

창자처럼 구불하던 마을길과 아무렇게나 개간이 되었던 논과 밭이 일자(一)로 곧게 펴졌고 바둑판처럼 정리가 되었다.

해마다 온 마을청년들이 몇 날 며칠을 마을회관에 모여 새끼줄을 꼬아 바꾸었던 초가지붕에 슬레이트라는 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사람들이 사는 집 지붕에 내려앉았고 그 지붕은 집집마다 색깔이 달랐다.


새마을운동이라는 범국민 운동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긍지를 심어주었다.

국민학교 시험에 자주 새마을운동의 3대 실천과제를 묻는 시험이 나왔으며 답안지에 '근면, 자주, 협동'이라 쓴 친구의 답안지에 빨간색 색연필로 선생님이 O자로 맞다는 표시를 해주셨다.  


그때 가끔 지붕에 쓰이고 버려진 슬레이트를 주워 고기도 구워 먹었는데 최근에야 안 사실이 그것이 석면이었으며 1급 발암 물질이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나를 부르던 호칭이 달라졌다.

어린이라 부르지 않고 학생이라 불렀다.

그 중학교 배정은 내가 돌린 뺑뺑이 통에서 떨어진 것에 적힌 대로 그 학교에 갔다.

중학교에 입학을 할 때는 어린이 때 기른 머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빡빡 밀고 입었던 옷을 벗고 교복이라는 똑같은 것으로 바꾸어 입었다.


3년 내내 선생님은 우리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손가락 사이로 그것이 삐져나오면 이발기구로 머리 한가운데로 밀었고 우리는 그 기구를 바리깡이라 하였다.

교복은 목에 쇳덩어리 같은 딱딱한 것을 넣어 잠그게 하였고 그것을 풀고 다니는 아이들을 불량학생 취급하며 선생님들은 매를 들면서 '호꾸 잠궈'라 하셨다.


이때쯤에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국가정책에 베이비부머세대라는 멍에를 안고 태어난 우리는 아이를 둘만 낳으라는 산아제한 정책의 아이러니와 마주하였다.

10년 후 우리는 아이를 하나만 낳아 잘 기르라는 더 지독한 아이러니와 만났다.


2023년 현재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이 셋의 가구에 오만 혜택을 주고 있다.

딱 60년을 살면서 3번이나 급선회하는 국가시책을 보았다.


國家百年大計라 말씀하신 옛 선현은 지금의 일을 미리 아셨을까?


고등학교 3년도 중학교 3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복불복 뺑뺑이가 아닌 시험실력으로 학교를 선택하였다.

연합고사라는 과거시험을 치루어서 합격을 하면 다녔고 그렇지 못하면 재수를 하거나 공장에 취직하였다.


형편이 안 되는 친구들은 중학교까지만 하고 일찌감치  공장에 취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남자이면 공돌이, 여자이면 공순이라 불렀다.


중학생때와 다른 것은 머리를 조금 더 기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앞머리만 3cm까지 허용하였고 그때도 선생님들 손은 수시로 우리들 머리밑을 파고들며 수치를 넘은 아이들은 머리밑으로 바리깡이 지나다녔다.

63년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이듬해 교복이 자율화되었고 또 다음 해 머리까지 자율화되었다.

아직 학생의 신분이었는데도 교련이라는 과목으로 손에 총과 칼을 들게 하고 총검술을 가르치고 재식훈련을 시켰다.


대부분의 친구들 학업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은 3학년의 과정을 마치면 취직을 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다 여겼다.

나도 그때 교련복을 입은 채로 은행에 입행하였다.

어쩌다 대학생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 저 사람 대학생이다 '라고 하였다.

대학생이 귀하였다.


다행히 취업의 길은 많이 넓었다.

구직보다는 구인이 많아 취업을 뷔페식당에서 음식 고르듯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최고의 그것이 된 공무원의 직업을 일컬어

'할거 없으면 공무원이나 해볼까'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되어 입대한 군에서는 선임들이 후임들을 많이 때렸고 맞은 후임들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맞지 않고 잠자리에 누운 어떤 날은 불안해서 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한차례 기합을 받고 자는 것이 마음이 편하였다.

- 다행히 우리 선배세대들이 군에서 겪었던 맞은 사람이 다쳤을 만큼의 심한 구타( 소위 빠따 )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는 온 국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일컬어 민관군이라 하지 않고 군관민이라 하며 軍을 최고로 하고 民을 최하의 자리에 두었다.


취업한 직장에서도 선임과 후임의 서열이 엄격하였다.

5~6년 선배들은 신입인 우리한테 담배심부름은 예사로 시켰고 어떤 선배는 자신의 구두를 벗어주며 닦아오라고도 하였다.


담배를 사러 가면서, 그들이 벗어준 구두를 닦으러 가면서도 한 번도 서럽다, 내가 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월은 63년생들에게 사회 초년의 때를 조금씩 벗겨주었다.

70년생들이 하나둘 입사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80년생들이 입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63년생 누구도 그들에게 담배, 구두심부름을 시키지 못하였다.

그런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샌드위치에 끼인 세대로 꽤나 긴 세월을 다니던 직장을 다녀야 했다.

쳐다본 위에는 아직 우리를 신입으로 보고 있는 우리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던 세대들이 이제 직장 최고의 자리에서 '인사고과'라는 칼자루를 쥐고 구두를 닦아오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고

내려본 아래에는 합리적, 현실적 이론으로 매섭게 무장한 젊은 세대들이  '제가 왜 그걸 해야 하죠'라며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직장에서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는 또 다른 세대사람들은 우리더러 낀세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어째 좀 서글퍼 보여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보고 낀세대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늘 가슴에 파묻혀 엄마, 아빠 하며 재롱을 부릴 것 같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느새 바리톤의 음색으로 변하였고 팥으로 메주를 쇈다고 해도 믿을 녀석들이 꼬박꼬박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이 눔들이 1년에 두 번 들고 오는 학비청구서의 무게는 매번 지난번 보다 무겁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납덩이가 되어 양쪽어깨를 짓누른다.


일이 바빠 두어 달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면 부모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느그 요새 무슨 일 있나?

지난주에는 영철이가 저그엄마, 아부지 잡수라꼬 묵을 꺼 바리바리 사서 왔던데...."

그리고 보니 나는 아이들 부모이기도 하지만 내 부모님 자식이기도 하였다.


1997년

63년생 우리가 34살이 되던 해

우리에게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던 신종 외래어가 우리 곁에 훅 다가오더니 우리를 많이도 힘들게 하였다.

어떤 이는 그 외래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에서 밀려났고 그들 중 일부는 그 일이 가장의 책임김과 맞물려 스스로 요단강의 배에 오른 이도 있었다.


아무 잘못 없이 그저 회사일에 충실하였지만 회사는 IMF와 구조조정이라는 팻말을 앞에 꽂고 한참 아이들 앞에 돈이 들어갈 그 무렵쯤 그들을 찬바람이 휭휭 부는 거리로 내 몰았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위로하였다.

"비 오는 날 비를 흠뻑 맞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어서라도 잘리지 말고 잘 견디자"


그 IMF라는 외래 괴물은 이후에도 4년 정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우리 애간장을 태웠다.  


花無十日紅의 말은 맞지 않은 것 같다.

우리들 머리 위에서 무성히 도 피어있던 무거운 꽃들은 열흘을 훨씬 넘는 20년 이상 우리들 머리 위에 피어있다가 천천히 시들어갔다.

우리의 낀 생활도 20년간 이어졌다.

 

어느새 우리가 그렇게 진 꽃들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내가 앉은 의자가 분명히 높기는 하다.

눈을 들어 올려보니 내 위에는 아무도 없고 내려다본 아래에는 꽤 많은 후배들의 머리가 보인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는 아니다.

우리가 젊은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직장을 다녔을 때는 그래도 승진을 할 때 " 형님 먼저 "하며 연공서열을 우선하였으나 우리의 후배들은 "능력 먼저" 하며 형님을 앞지르기가 예사이고 동생의 뒤에 서기를 예사로 고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후배들은 우리더러 "꼰대"라는 멍에를 씌우고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돌아서 버린다.

그 말을 두 번 하기가 버겁고 두렵다.


우리도 작년, 올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花無五年紅

우리 세대들 대부분은 직장 최고의 자리에서 5년 정도 붉게 피었다가 이내 시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껏 내 존재의 이유였고 내가 넘어지고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를 넘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꽉 잡아 주었던 가족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예전만 못하다.

퇴직을 하고 갈 곳이 없어 집에라도 있을라치면 아내는 나를 보고 두식이, 삼식이 하면서 눈치를 주고 아이들은 내가 작정을 하고 그놈들 얼굴을 보려 하지 않으면 1년 내내 도무지 얼굴조차 볼 수가 없다.


친구라도 만나려 나와 처지가 비슷한 녀석에게 전화를 하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된다며 나를 거부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녀석들은 그렇게 나오면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 하고 같이 커피라도 마셔야 하기 때문에 그 돈이 부담이 된다는 것을.....

그 친구에게 다시 전화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오늘이 내 생일이다.

평소 전화 한 통, 계좌이체로 돈 조금으로 때우던 자식눔들이 어제, 오늘은 왠지 호들갑을 떤다.

어제부터 딸이 사위와 함께 손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와서 내일은 무조건 지들이 하자는 대로만 하란다.

아들도 그렇게 하라고 거든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벽면에 작은 현수막이 걸려있다.

                   [   축   환     갑     ]

" 꽃보다 예쁜 우리 아빠

젊은 청춘을 우리를 위해 다 쓰신 우리 아빠

이제는 당신을 위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세요.

회갑 축하드립니다.

  - 아빠의 영원한 두 딸 & 아들♡

아이들 셋이 현수막 앞에 나를 세우고 케이크에 불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터지는 풍선에서는 돈바발이 쏟아진다.

귀여운 손자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보니 오늘은 그냥 생일이 아니고 환갑이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들의 환갑축하연에 대한 눈물인지, 그래도 이 눔들이 젊은 날 내가 애쓴 것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고마움의 눈물인지, 아니면 내가 벌써 환갑인가 하는 회한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물이 계속 흐른다.

오늘만큼은 아버지로서의 씩씩함을 보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울었다.


아이 셋과 아내가 돌아서서 울었다.

그동안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이 오늘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마움이 대신 앉았다.


그리고 보니 내가 태어나던 해가 계묘년 토끼의 해였는데 올해 2023년도 같은 토끼의 해이다.

내가 바빴던 젊은 날 토끼의 해가 네 번이나 지나갔지만 그때의 나는 삶이 바빠 지금이 토끼의 해인지 조차 모르고 보냈는데 다섯 번째 토끼의 해 때에는 내 아이들과 손자가 '올해 당신 환갑이요'하며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아직 마음이 40대이고 몸도 그렇게 늙지를 않았는데............

그런데 어쩌나?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얼마 전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나와 친구들 모두 初老의 환갑 노인이 맞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곱게 늙어가자.

추하지 말자.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자.

그들에게 반말하며 가르치려 들지 말자.

젊은이들이 카페에서 라테를 주문할 수 있게 '내 옛날에는, 나 때는 말아야' 하며 고장 난 축음기가 내는 탁한 소리는 내지 말자.

했던 이야기 또 하지 말자.

늙으면 다 그렇지 뭐 하며 구질구질하게 다니지 말자.


잘 익어가자


골프장에서 내가 친 드라이브 티샷을 보고 나보다 거리가 한참 짧은 나와 같은 51년생 토끼띠 선배님이 나더러 그러신다.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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