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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Jan 27. 2024

별사람 없더이다.

신하가 임금 앞에 엎드리자 임금이 허리를 숙여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신하를 일으키는 임금은 젊었고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선 신하는 늙었다.

임금은 늙은 신하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

이제 신(臣)의 나이 일흔이 넘었사옵니다.

신(臣)의 몸이 쇠(衰) 하니 정신이 청(淸) 하지 못하고 청(淸) 하지 못하니 탁()하옵니다.

무릇 신하는 항시 몸이 강건하고 정신이 맑아야 임금께 바른 정사를 간언(諫言)하고 직언(直言)할 수 있을진대 스스로가 맑지 못하면 그리하지 못하옵니다.

이것은 조정과 종묘사직 대하여서는 도리가 아니옵고 임금께는 불충(不忠)이옵니다.

하여 신은 이 자리에서 전하께 사직을 청하옵니다.

윤허하소서"


노신(老臣)이 임금께 사직을 청(請)하였다.


"아니오.

경(卿)의 나이 일흔이 넘은 것은 사실이나 아직 경의 몸은 쇠하지 아니하였고 경이 말한 정신이 청(淸) 하지 못하다 함은 사실이 아니요.

경은 학문이 깊고 도량이 넓으며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숱한 지혜와 풍부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과인은 아직 경의 그런 지혜와 경험이 필요하오.

해서 경의 사직은 아직은  허락할 수가 없소"

 

요 몇 달 새 두세 번 노신의 사직청원을 받아온 임금이 그때도 그랬고 오늘도 신하의 눈을 보며 사직을 반려하였다.


"하오나  전하!

신하가 임금께 맑지 못한 정신과 그로 인하여 바르지  못한 말로 마주한다면 이것은 불충(不忠)이요 사직에 대한 예(禮)가 아니옵니다.

이번만큼은 소신의 사직을 윤허하소서"


신하가 재차 임금께 사직을 청하였다.


"불충이라 하였소?

임금이 신하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데 뿌리치고 기어이 떠나려는 것과 그리하여 신하 자신의 평안함과 영달만을 추구하려는 이것이야말로 불충(不忠)이 아니요?


경은 자주 경전에서 아랫사람들에게 군사부(君師父)는 일체(一體)라 가르치지 않았소.

임금과 부모는 일체일진대 자식이 나이가 들었다고 어찌 그가 부모섬기기를 마다할 것이요?

그것이 경이 말씀하신 효(孝)인 것이요?


또한 과인이 세자 때 경이 과인에게 자주 오륜(五倫)을 말씀하시면서 군신(君臣)은 유의(有義)해야한다 하지 않으셨소.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한다 하지 않으셨소?


내 거듭 말하오만 경의 사직은 윤허치 않겠소.

하니 더는 거론치 마시요.

이것은 어명이요."


하였다.


다른 말에서는 힘찬 임금의 목소리가 '이것은 어명이요' 하는 곳에서 힘이 빠졌다.

임금이 어명을 동원해서라도 떠나려는 신하를 붙잡았고 신하는 임금의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다.


임금이 다가가서 모아 포개어져 있는 신하의 두 손을 잡고 고개를 들어라 말하였다.

노신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임금과 눈을 맞추었다.


신하는 더 이상 사직을 청하지는 않았다.


대신 임금이 신하에게 1년 동안 정사(政事)에서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하고 오라며 유급휴가를 주었다.

딱 1년이라는 당부를 재차 하였다.


임금이 필마와 몸종 하나를 내어주려 하였으나 신하가 거절하였다.

신하는 자신의 집에서 기르던 노마(老馬) 한필을 타고 사흘 뒤 길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임금이 물었다.

"그래

경은 어디로 가 볼 계획이요?

또 그곳에서 무엇을 볼 것이며 누구를 만날 것이요?"


신하는 그저 말이 이끄는 대로 갈 것이며 그곳에서 보이는 것을 보고 또한 마주하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만 말하였다.


임금이 작게 웃었다.


일각삼추(一刻三秋)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단어였다.

정사에 바쁜 임금은 삼추가 일각이었다.


유급휴가를 얻어 길 떠났던 늙은 신하가 돌아왔다.


임금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노신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그래 무탈한 게요?

그래 별 탈은 없었소?

어디로 갔었소?

무엇을 보고 오셨소?

그래 경이 보신 것들이 어땠소?"


"그간 강령하셨사옵니까 전하?"

임금이 신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전하 염려 덕분에 무탈하였사옵니다.

별 탈도 없었사옵니다."


신하가 고개를 숙여 임금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이곳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와 청주고을이 있는 충청도를 갔었고 전주와 나주가 있는 전라도를 갔었사옵니다.

또 경주와 상주가 있는 경상도에도 가 보았지요"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깜빡였다.


"그곳에서 전하가 다스리시는 천하를 보았사온대 비단을 수놓은 듯 강이 흐르고 그 강 위에 산이 있었나이다.

가히 금수강산이었사옵니다."


신하가 말을 이었다.

"낙향한 정연태를 청주에서 만났사옵니다."


"선왕 때 조판서로 재직하다가 3년 전에 낙향한 그 정연태 말이지요?

그래 그분이 청주에 계셨소?

그분은 성품이 참으로 호탕하고 낙(樂)한 분이라 그곳에서도 유유자적하시지요?"


임금이 정연태를 알고 있었다.


"하옵고

경주에서 섭경도 만났사옵니다.

그는 신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이옵니다."


"섭경이라면 경주에서 자신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 없다 들었소.

그는 진정한 부자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모으는 것이라 하여 가뭄과 장마 때 자신의 간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는 자 아니요.

과연 유유상종(類類相從)이요.

과연 경의 벗답소.

그 자가 경을 후히 대접하였소?

그런 자들은 대체 전생에서 무슨 복을 지어 지금 대(代)가 이리 풍요롭단 말이요?"


임금이 신하의 눈에서 자신의 눈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나주에 있는 손지목을 만나보고 왔사옵니다"


"손지목은 누구요?"


임금이 정연태와 섭경은 알고 있었으나 손지목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예. 전하

손지목이라는 자는 선왕 때 치른 대과(大科)의 문과 전시(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정치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조정에 등원조차 하지 않고 바로 낙향하여 시를 쓰고 시조를 읊으며 오직 문(文)만을 공부하는 자 이옵니다.

소신이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자(者)의 영향력 때문이었사옵니다."


임금이 의아해하며 말하였다.

"우리 조선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말이요?

급제를 위해 수년을 공부하고 급제가 되면 바로 등원하여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향해 내 달리는 여염의 사람들과는 다른 진정한 학자시구려.

그래 그자와 많은 담소를 나누었소?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는 그자의 얼굴은 밝아 보였소?"


임금은 마치 자신이 1년의 유랑을 마치고 입궐한 양 신이 나서 이리 묻고 저리 물었다.

마치 어린 아들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범을 본 아비에게 범 생김새를 묻는 것과 같았다.


"전하!

소신이 첫 번째로 만나 본 청주의 정연태는 낙향을 하고 그 이듬해에 큰 병을 얻어 지금은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 부인이 떠다 주는 밥과 물을 억지로 받아먹고 연명하며 자리에 누운 채로 신(臣)을 맞이하고 누운채로 배웅하였사옵니다.


또 경주의 섭경은 본처에서 자식 다섯을 보았고 첩에게서 자식을 일곱을 보았사온데 이들이 하나같이 아비의 재산에 눈이 멀어 아비의 면전에서 치고박으며 싸우는 통에 삶의 재미를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사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지요.


마지막으로 만난 나주의 손지목은 모름지기 문(文)은 풍류를 위해 존재하여야 하며 그 풍류는 주(酒)와 색(色)에서 나온다는 괴상한 논리에 빠져 너무 술에 자신을 의존하다가 지금은 술병이 들어 문(文)은커녕 스스로를 가누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별 사람 없더이다.

전하"


노신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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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어쩌면 자주)우리는 혼자 무인도에 던져 진것 같은 깊은 외로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칫 그 외로움의 끝이 우리의 폐부속 깊이 들어와 나 혼자 뒤로 가는 것같은, 나 혼자 세상에 필요없는 것같은 생각들이 나를 온통 지배하기도 하지요.

 

내 친구 형철이는 늘 바쁘게 살던데 ㆍㆍ

내 직장동료 권과장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던데ㆍㆍ


그러나 그들의 속으로 한발자욱만 들어가서 보면 그들 역시 폐부속 깊이 뾰족한 바늘하나, 날카로운 송곳하나를 고 살아간답니다.

그저 바쁘고,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별사람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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