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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Apr 09. 2024

얻음과 잃음

"종열이 니는 바람이 마이(많이)부는 날은 앵간하마(어지간하면)밖으로 나가지 말고 꼭 나갈 일 있으마 주무이(호주머니)에 돌이나 동전을 꽉 채아가(채워서)나가거래이~."

말을 참으로 재미있고 짓궂게 하는 친한 친구가 퇴직 전에 나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이야기이다.


너무 마른 내가 혹시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외출을 했다가 바람에 날려갈까 봐 나를 풍자해서 한 말이었다.


퇴직 전에 나는 말라도 너무 말랐었다.


매년 계절이 바뀌어 작년에 입었던 옷들다시 돌아온 계절에 입으려면 늘 허리를 한 사이즈씩 줄여야 입을 수 있었는데 같은 옷을 서 너번 줄이는 것은 예사였고 그때 나는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었다.

그때 나는 살을 뺀다며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배가 나와 허리끈을 잠그지 못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의 로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지인들이 나한테 하는 인사말은 꼭 미리 인쇄된 글자를 찍어내 듯 똑같았다.

"아이구 야야~

니 와이래 말랐노?

입이 막 돌아 간다 야야.

니 어디 아픈거 아이가? "


살찐 사람한테 뚱뚱하다고 하는 말 이상으로 마른 사람들한테 말랐다고 하는 말도 스트레스이고 듣기 싫은 소리였는데도 사람들은 나한테 그리 말하였다.

나더러 날씬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도 내가 말랐다는 단어 대용(代用)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터이라 내 귀에는 너 많이 말랐구나로 자동편집 해서 들렸다.


나를 살찌워 보려는 친구들의 조언도 이어졌다.

'찹쌀떡을 주식(主食)으로 해 봐라.

자기 전에 맥주를 한 캔씩 먹고 자 봐라.

라면을 퉁퉁불게 삶아서 먹고 바로 잠들어라.

이것 먹어봐라.

저렇게 자 봐라'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조언은 나에게 쳇기만 더하게 하였고 알코올분해 능력이 전무한 나를 괴롭게만 했을 뿐 내가 살찌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내가 30대 나이가 되었을 어느 때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은행에서 매년 해주는 건강검진에서 내 몸무게가 49kg로 나온 것이었다.

30대 남자 몸무게가 50kg가 되지 않은 것을 본 나는 체중계 눈금을 보고 일순간 당황하였고 검진을 하던 간호사분 고개가 갸우뚱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다시 재 보까예?"

49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는 체중계 눈금이 민망하였는지 간호사님이 나한테 그랬다.

"그라까예?"

내려온 지 30초도 되지 않은 체중계에 다시 올라섰다.


간호사분은 내가 민망할 까봐 그러셨고 나는 그런 간호사님이 민망할 까봐 다시 체중계로 올라갔지만 눈치없

는 체중계는 이번에도 영락없이 지신의 눈금을 49에다 세우고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라면서 나를 조롱하였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때쯤

병원으로부터 직원들 건강검진 결과표가 하나둘씩 지점으로 우편배달이 되어 왔다.


'나는 또 콜레스테롤이 높단다.

나는 또 혈압이 높다네.

나는 또 당뇨를 조심하라고 하네.'


검진결과표를 손에 든 직원 몇몇이 몇 해 전부터 해왔던 똑같은 말을 하면서 이 놈의 콜레스테롤, 이 놈의 혈압, 이 놈의 당뇨라고 탄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약간은 뚱뚱하였고 약간은 둔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끈을 느슨하게 혹은 그냥 바지에 걸치고만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나는 내심 부러웠다.

그때까지 내 검진결과표는 아직 지점으로 배달되어 오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나를 제외한 지점 직원들 전부에게 결과표가 도착을 하였는데도 유독 내 결과표만 오지 않고 있었다.

슬슬 불안해졌다.

부정적이고 무서운 생각들이 하나씩 내 머릿속으로 마른논으로 물이 스미듯 밀고 들어왔고 아직 기저귀를 벗지 못하고 있는 딸아이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혹시 나에게 큰 병이 있어 저 아이를 두고 가야 하면 어떡하지?'


내 자리로 전화 한 통이 울렸다.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ㅇㅇ은행 ㅇㅇㅇ지점 카드계 이종열 계장입니다."


출근하면 하루에 수십 번씩 하는 전화수화 맨트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일전에 이종열 님이 건강검진 하신 ㅇㅇ병원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아무 때나 시간 괜찮으실 때 저희 병원에 한번 내원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 원장님이 이종열 님을 한번 뵙자고 하셔서요."


병원직원분 말이 끝나고 1~2초 사이에 열 가지가 넘는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보자고 하는 걸까?

그것도 나만....

결과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각한 병이 나에게 있나?

그래서 나만 결과표가 오지 않았구나.'


다음날 담당 대리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검진병원으로 갔다.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어제보다 더 많은 무서운 생각들이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른논에 스미는 물이 아니라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 듯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대기실에 걸려있는 벽시계가 참으로 디디게 갔다.


"이종열 님!" 

하얀색 가운을 입은 간호사분이 내 이름을 호명하였다.

대기실의자에서 원장님 방까지 여덟 걸음수가 세어졌다.


" 안녕하세요?"

의사분께 하는 내 인사말에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이내 의사의 표정을 살폈다.


"아, 예.

이종열 님~~

앉으세요."

의사분이 나에게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의사분 바로 앞과 옆으로 꽤나 많은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직감적으로 나의 내장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수 초간 의사분은 말없이 그 사진들을 훑어보고만 있었다.

의사의 침묵과 내 주눅은 정비례하였다.


"흐으음~~"

의사분은 표정변화 없이 의자를 돌려 내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시험 발표를 보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아이디,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결과가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는 그런 심정이었다.


"이종열 님!

결과를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죠?"


'이 무슨 시추에이션?

검진의가 의뢰인의 지금 상태를 사실대로 말씀을 해주시면 되지 웬 질문?'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은 비단 의사의 침묵만이 아니었다.

의사의 웅변도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아, 예 뭐"

나는 어쭙잖게 의사분의 질문에 답하였고 의사분이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이종열 님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격이 많이 급하십니까, 느긋합니까?

완벽주의자입니까, 아니면 대충주의자입니까?

사전준비형입니까? 일이 닥치면 하는 그때 상황에 따라 해결하는 타입인가요?"


의사분이 또다시 나를 보며 사실대로 라는 말을 하였다.


"예.

성격이 급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그리고 완벽주의자입니다. 그것도 지나치게요.

그리고 사전 준비형입니다. 그것도 내가 피곤할 정도로요."


의사의 세 가지 질문에 내가 세 가지로 대답하였다.

대답의 끝에 많이요, 지나치게요, 피곤할 정도로요 하는 접미사도 세 번 붙었다.  


"이종열 님!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방금 이종열 님이 대답하신 세 가지 성격을 정반대로 바꾸세요.

계속해서 그 성격을 가지고 나이가 들어가면 중년의 나이쯤에 그 성격이 분명 치명적인 신체의 병을 불러올 것입니다.

느긋하게, 대충대충, 그리고 일이 실제 닥쳤을 때 그때 해결책을 찾는 성격을 지금 이 방을 나서면 바로 바꾸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아니 바로 바꾸셔야 합니다.

제 말 명심하세요."


의사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검진사진을 하나씩 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건강검진을 하면서 이종열 님과 같은 연령대에서 이렇게 장기(腸器)가 깨끗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성인남자의 몸무게가 50kg가 되지 않는 것이 의아하여 사진판독을 다시 한다고 결과가 늦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성격 때문인 것 같아 말씀드린 것이니까 꼭 바꾸세요."


그때 내 귀에는 의사의 그런 충고보다 내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만 들렸고 나의 급한 성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였는데 11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는 10초를 기다리지 못하였다.

버튼을 누르고 바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으면 뛰어 내려가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에 11층에서 1층까지 뛰었고 은행업무던 개인적인 일이던 누가 보면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을 추구하였다.


곧 닥칠 일이라 생각되는 일은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1 안부터 10안까지의 대비책을 마련해 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피곤한 사람이라 하였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미련한 사람이라 생각하였다.


업무처리 과정에서 직장상사들과 내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툼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도 완벽한 업무처리 때문에 여러 개의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은행업무를 하면서도 지금 일을 하면서 다음 일을 생각하였고 식사를 하면서도 다음 일을 생각하였다.

나에게 식사시간은 식도락을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일을 계획하고 구상하는 시간이었다.


나를 많이도 피곤하게 하였고 내가 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덕분에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나는 체기를 달고 살았고 머릿속은 늘 다음에 해야 할 일 때문에 복잡하였다.

자주 나 자신의 이런 삶이 싫어 세월이 빨리 가서 퇴직을 하고 사람도 없고 스케줄도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 나는 자주 친구들에게 '내 평생소원이 내가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숫자 앞에 6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이런 바람들은 세월이 해결해 주었다.

세월이 그렇게나 좋았던 나의 시력을 흐리게 하여 내 눈에 뿔테 안경을 씌었고, 세월이 그렇게나 까맣던 나의 머리카락을 희끗희끗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그렇게 좋았던 어쩌면 그것 때문에 많이 피곤하였던 나의 기억력도 하나씩 지워 잊어버리게 하고 사소한 것까지 메모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 슬슬 후배직원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혹여 저 친구들이 나를 젖은 낙엽 취급하기 전에 떠나야지 하는 마음이 시나브로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퇴직하였다.

그때 나는 직장을 잃고 자존심을 지켰다.


직장인들의 인생은 분명 퇴직 전과 퇴직 후로 양분되어 있는 듯하다.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자고 일어나 새로운 날을 맞이하였지만 세상 어디에도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나를 찾는 곳도 없었다.

오후쯤에 다시 충전을 해야 할 만큼 많이 오던 전화기도 울지 않았고 내가 걸지 않으면 전화기로써의 역할도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백수라는 단어가 5년쯤 입었던 옷처럼 편안하게 들리고 집에서도 가장으로서의 가오도, 위치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이 집 가장이라고 하는 내 모습이 억지를 쓰는 것 같고 혼자만의 독백인 듯하여 자꾸만 서글퍼져 갔다.


퇴직 전에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나를 그렇게 성가시게 하였던 나의 일상들이 신기루처럼 하니씩 사라져 갔다.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하다.


매체에서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 마음 쓰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도 똑같은 말을 하였다.


그들의 충고와 조언이 없어도 나는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했다.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유튜브 어느 채널에서 인생 2막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꽤나 긴 영상물이었는데 2막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행복하였는가를 찾아보고 그것을 하면서 살아라고 하였다.

여행이 행복하면 여행을 하고 낚시가 행복하면 낚시를 하고 사진 찍는 것이 좋으면 카메라를 메고 떠나라고 하였다.


나는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얼핏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나에게 감겨 있는 태엽을 풀면서 똑같은 길을 오가는 시계추 마냥 매일을 똑같은 삶을 살아왔는 것 같다.

진정한 나의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저 통속적으로 내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내가 직장에서 승진하고 내 pay가 오를 때만 행복하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랬다.


막상 아이 셋 모두 제 자리를 찾아 내 품을 떠나고 나는 더 이상 승진할 일도, 내 월급이 오를 일이 없는 지금 내가 나에게 내 행복을 물으니 망설여졌다.


'내가 그렇게 살았구나.'  


그러다 브런치와 만나고, 장편소설을 습작하고 이들을 쓰기 위해 독서하는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는 글과 함께 할 때가 행복하구나.'


틈틈이 글을 쓰고 읽고 하면서 나는 자주 천국을 보고 느낀다.

그리고 보니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하였구나 하는 잃어버렸던 생각을 40년 만에 다시 찾았다.


글을 쓰다가 잘못되면 지우고 쓰여 있는 단어를 빼고 새로운 단어를 다시 넣는 퇴고의 시간을 아무리 길게 하고 많이 하여도 누구 하나 나를 채근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그렇게 5년 정도의 세월이 갔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없기에 내 성격이 급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군다나 내가 완벽해야 일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야 할 일도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없다.


얼마 전부터 식사를 하면서 자주 느꼈다.

'내가 식사량이 많이 늘었구나.

내가 식사를 참으로 느긋하게 하는구나.'


그리고 보니 나에게 늘 붙어 다니던 쳇기도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참으로 좋았던 어느 하루


마음이 잘 통하는 좋은 사람들과 라운드가 있었는데 그날은 골프가 너무나 잘 되었다.

77타

싱글핸디의 타수로 라운드를 마쳤다.


자주 하지 못하였던 내 싱글핸디의 골프라 그날의 나는 기분이 너무 좋고 행복하였다.


골프를 마치고 샤워 후 체중계에 올라가 보았다.

지금껏 늘 보아왔던 체중계에서의 55,56이라는 숫자에 내 눈과 뇌가 익숙해져 있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본 체중계의 숫자가 61.28kg라고 쓰여 있었다.


'헉?????
이것이 꿈인가?

혹시 체중계가 고장인가?'


오늘 함께 하였던 골프 동반자에게 체중계에 한번 올라가 보라고 내가 부탁하였다.

평소 자기 체중이 맞단다.


내가 다시 올라가 보았다.

61.28이라고 다시 한번 찍어 주었다.


그날 나는 체중계 위에서 울 뻔하였다.

체중계 위에서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몸무게를 재어보고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우리나라 최초의, 어쩌면 세계 최초의 남자가 되었다.


세상의 일이 그런가 보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가 보다.


나는 35년의 나의 천직을 내려놓고 내 행복과 나의 건강을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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