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는 화로 속 장작불이 연기를 휘감아 하늘로 퍼지게 하면 솥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고소하고 은은한 단내가 코 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나는 평상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도, 엄마가 만드는 술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꼴깍꼴깍" 군침이 절로 삼켜지고, 내 온몸의 신경이 오직 그곳에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제과점이 없는 작은 섬마을에서 갓 만들어낸 빵은 정말 귀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밀가루와 막걸리, 그리고 사카린을 섞어 만든 그 술빵은 '뜨끈뜨끈함' 그 자체로 좋았다. 시장에서 파는 지금의 술빵처럼 폭신하거나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간식거리가 귀한 시골에서 엄마 손에서 탄생한 그 술빵 맛은 지금도 아련히 마음 한구석에 깊이 남아있다.
엄마는 좁은 부엌을 벗어나 마당에 화덕을 놓고 자주 요리를 하셨다. 큰 솥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요리들이 나왔다. 떡, 국수, 팥죽, 삼계탕 등 마당에서 요리해서 평상에 앉아 먹는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엄마가 솥에다 요리를 할 때면 항상 이웃들을 부르곤 하셨다. 평상에 앉아 요리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그 기다림 속에 행복한 셀렘과 기대감을 쌓아갔다.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에는 따뜻한 마음과 정이 녹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작불을 지피고 요리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까이 가면 매캐한 연기에 눈이 시리고 땀이 쉬지 않고 흐르니 말이다. 엄마는 두툼한 수건을 목에 두르고 연신 흐르는 땀과 눈물을 닦아내며 손이 쉴 틈 없이 분주히 움직이셨다. 붉은 화로처럼 붉게 물든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집 마당은 나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이자 공부방이었다. 안방에서 이어지는 마루가 비좁은 탓에 마당으로 이어 붙인 널찍한 평상이 있어, 숙제도 하고 간식도 먹고 잉꼬 새장을 보며 놀았었다. 평상 위에는 플라스틱 구조물로 만든 그늘막이 있어 뜨거운 햇빛과 비바람을 막아주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초등학교 시절을 온전히 보낸 고향집의 기억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옥상이 있는 규모가 제법 큰 집이었다. 주변에는 옥상이 있는 집이 없어서 나름 선망의 대상이 된 집이기도 했다. 'ㄷ'자 모양으로 방이 많고 각각 독립된 살림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 많을 때는 세 가족에게까지 세를 주기도 했었다. 화장실과 욕실이 밖에 하나뿐이라 여러 사람 쓰는 것이 불편했지만, 당시에는 그 불편함조차 모를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시절을 다 보낸 집이라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제 본 것처럼 그 집의 풍경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선명하게 그대로 그려진다. 소박하지만 어렸을 때 추억을 고스란히 담은 영원한 고향이자, 추억의 보금자리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뒤로는 산이 펼쳐지고, 앞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덕에 우리 집 주변뿐 아니라 그 아래 집들의 지붕과 마당까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옥상에 올라가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뒷 집 헛간에 소와 염소도 구경했다. 자꾸 울어대는 소리에 시끄럽기도 했지만, 소가 여물을 먹고 몇 번씩 되새김질하는 모습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됐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생각나서 저 멀리 보이는 고등학교 학생들 모습도 바라봤다. '혹시 운동장에서 교련 수업을 듣고 있는 저 학생들 속에 우리 언니도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옥상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오빠와 바닥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놓고 놀거나 공도 주고받으며 놀았다. 바람이 잔잔한 날엔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때로는 오빠는 냇가에서 잡아온 가재를 키우며 놀기도 했다. 큰 고무대야에다 돌과 수초 넣고 물을 채우고 최대한 자연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심심하면 가재끼리 싸움을 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여름밤, 더운 방 안에서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쐬러 옥상 위로 올라왔다. 옥상 위 평상에 앉아 과일도 먹고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반짝이든 별들을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찾고 있으면 '3'자 모양의 별자리가 눈에 띄었는데 저건 어떤 별자리인지 너무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니 그 별은 카시오페이아자리였다. 그 당시 별자리에 대해 더 알았었더라면 계절마다 변하는 별자리들을 찾는 재미에 흠뻑 빠졌을 것이다. 무한한 별들의 매력이 넘치는 밤하늘은 그 자체로 나에게 커다란 세상과 끝없는 호기심을 선물해 주었다.
옥상이 주는 매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옥상 위에서 보송보송 잘 마른빨래는 햇살이 주는 따스한 온기와 바람의 산뜻함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요즘처럼 건조기 속에서 돌아가는 옷가지들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손길이었다. 생선을 널어놓아도 짠내음 나는 해풍 덕분인지 꾸덕하게 잘 말라서, 찌거나 국으로 끓이면 짭조름하고 깊은 풍미가 더해져 더 맛있었다. 마치 바다의 향을 한 입 가득 담은 듯한 그 맛은 지금도 혀끝에 맴돌아 잊히지 않는다.
아빠는 분재를 좋아하셔서 우리 집 마당 화단에는 분재들로 넘쳐났다. 네모난 화분 안에서 자유자재로 다양한 모양과 생김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줄지어 서 있는 화분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온몸에 예술의 혼을 담은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연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좁을 화단을 가득 메운 분재들 속에서도 나는 매년 봉숭아를 심어 손톱에 물들이곤 했다. 빨갛게 물든 손톱을 보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화단의 가장자리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가을이 되면 붉은 대추알을 선물처럼 내어주곤 했다. 잉꼬들이 하늘나라로 떠난 자리에 작은 무덤이 되어 주던 화단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작은 세계였다.
많은 추억을 간직한 시골집을 떠올리면, 따스한 온기와 평화로움이 고스란히 내 안에 전해져 온다. 화로의 숯불에서 느껴지던 그 아늑한 불빛, 밤하늘을 끝없이 수놓던 반짝이던 별빛, 흙과 바람이 전하는 자연의 냄새, 그리고 나무와 꽃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은 오늘의 아파트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집은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집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누가 더 잘 사는지 가늠하는 척도로 변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가까운 이웃과 음식을 나눠먹고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원한 평상에 누워있으면 고소한 개떡 찌는 냄새가 풍겨나던 정겨운 집의 기억은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아이만 해도 7살 때 친구집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우리도 친구집처럼 넓은 집에서 살면 안 돼?"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에게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순간 고민스러웠다. 그저 할 수 있는 대답은 "친구 집이 정말 넓고 멋지기 했지! 넓은 집에 살면 정말 좋을 거야. 하지만 우리 집도 우리가 행복하게 지내는 아주 특별한 곳이란다. 넓은 집에서 산다고 해서 더 행복한 건 아니야. 진짜 행복은 집의 크기보다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에서 생기는 거야."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이겠지만,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너는 그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너랑은 친구 안 할래!"라는 말이 나온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집이 친구 관계를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 어린 시절 친구는 그저 가까이 살아 자주 볼 수 있으면 되었는데 말이다.
어린 시절 나의 집은 많은 추억을 갖게 해 준 따뜻하고 소중한 공간이었다. 우리아이들에게 그러한 추억을 선사하기 전에 내가 사는 집이 좋은지 나쁜지부터 생각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이다. 나에게 그러했듯 나의 아이들에게도 집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과 사랑이 가득한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그 동네를 지날 때 자연스레 한 번쯤 뒤돌아 볼 수 있는 곳, 함께 보냈던 시간으로 나의 발길을 자꾸 끌어당기는 그런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