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감의 미학 Sep 11. 2024

흑산도아가씨

환절기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쏴아~쏴아~철썩~철썩~" 바람과 파도의 협주곡이 귀를 때리면,  배는 "끼익~끼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앞뒤로 흔들리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그 순간, 몸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극한의 스릴과 공포로 떨렸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집채만 한 파도는 나를 덮치려는 쉬지 않고 휘몰아쳤다. 살을 에는 차디찬 겨울바람이 고양이 발톱처럼 얼굴을 사납게 할퀴고 가면 검붉은 피가 흐르는 듯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가슴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쥐어짤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고 나면 바다 한가운데서 주님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를 부르는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성난 바다는 더욱더 거세게 몰아치며 무시무시한 위력을 과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갯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몸이 축축해졌다. "꼴깍꼴깍" 아무리 침을 삼켜도 목구멍에선 식도를 타고 온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누르고 누르며 속을 달래 보며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라고 되뇌며 눈을 질끈 감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도했다.

손톱만 한 하얀 조각에 불과한 쾌속선은 위태로운 상황에도 거대한 물살을 가르며 대자연의 위협을 뚫고 망망대해를 향해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목포를 출발해 그렇게 두 시간을 버티면 도착하는 섬, 나의 첫 발령지, 바로 흑산도였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배에서 내려 섬에 첫 발 디뎠던 그 순간이 18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날 배를 타고 오면 그날 반나절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울렁거리는 속을 다독이며 시체처럼 방안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여름에는 또 어떠했는가! 흑산도는 여름철 홍도를 가려는 관광객들이 많아 배 안이 더 난리였다.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워진 선실 안에서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땀, 음식, 기름 냄새가 바다 고유의 비릿함과 뒤섞이면 멀미가 나서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나마 비금이나 도초는 배를 한 시간만 타면 됐다. 먼바다에 비하면 육지와 가깝기에 호수같이 잠잠한 바다를 건너는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이제부터 시작이군!' 이미 닥쳐올 난관을 예감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역시나 갑자기 배는 마치 젖몸살을 앓는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한 시간 동안의 고비를 꾹 참고 넘겨야 했다. 

나는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뱃멀미가 심하다. 그래서 배를 타는 것이 정말 싫었다. 섬 근무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통하지 않았고 운명은 나를 흑산도로 이끌었다. 발령이 확정된 후, 매일같이 배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여 오는 걱정과 긴장이 나를 옥죄었다.

 그래도 흑산도를 지나 더 먼바다로 한 시간 배를 타야 도착하는 가거도에 발령 난 동기를 생각하면 걱정과 안도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가거도로 발령 났던 동기 두 명 중 한 명은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흑산도는 나의 첫 근무지여서 일 수 도 있지만 지리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20대 중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섬이라는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상황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갑갑했다. 친구들과 즐겁고 활기찬 시간을 보내야 할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외딴섬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깊은 외로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마음껏 어디든 갈 수 없다는 현실은 나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섬 특성상 습도가 높아 지네가 자주 출몰하여 365일 원터치 모기장을 방에 설치해 놓고 생활해야 했다. 여름이면 에어컨 없는 관사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오늘날 에어컨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디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보일러는 고장이 잦아 사비를 들여 고쳐야 했고, 물이 귀해 단수가 빈번했다. 먹는 물을 구하기 위해 생수를 사 오거나 지하수가 나오는 근처 교회에 가서 신세를 져야 했다.

주말이 되면 모든 교직원이 섬을 떠나 집을 다녀왔는데, 일기예보를 통해 일요일에 배가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주말에는 나갈 수 없었다. 들어오지 못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무작정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주일을 섬에서 지내다 보면 갑갑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번은 모두가 섬을 떠난 주말에 혼자 관사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아 돌아오는 배편에서 멀미를 할 생각에 그냥 혼자 남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관사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이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고 방범창이 없는 구조에 오래된 구리색 출입문이 덜커덕거리는 소리는 섬뜩하게 들려왔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당장 도움을 청할 길초자 없다는 현실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마치 외딴 무인도에 홀로 내 던져진 듯한 고립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밤새 TV를 켜놓고 희미한 불빛을 의지하며 그저 날이  빨리 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새로운 업무를 하나씩 터득해 가는 과정 또한 녹록지 않았다. 지금처럼 업무 관련 교육을 자주 한다거나 지침이나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던 시절이 아니라 업무를 익히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의 첫 직장이라 생각하면 자부심을 느꼈고,  행정실 직원들과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끈끈한 동료애를 쌓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곳에서의 시간은 힘들었지만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근무한 학교는 겨울철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 새벽이면 어김없이 무인경비가 울렸다. 육지라면 경비 회사 직원이 달려왔을 텐데, 이 외딴섬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옆에 직원을 깨워 손전등 하나 들고 학교에 가야 했다. 어두운 학교 건물의 문단속을 다시 하고 돌아오는 길, 피곤함을 견디지 못한 하품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깨뜨리며 퍼져 나갔다.  

어떤 날은 밤중에 부엉이가 복도 안으로 들어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엉이의 커다란 눈과 마주친 순간, 온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잡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그 상황에 겨우 한쪽으로 몰아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업무가 많아 혼자 야근을 하는 날은 정말 무서웠다. 적막한 시골 밤에 마치 사람의 인기척인 양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나방들의 날갯짓 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깜짝 놀라게 했다. 학교 주변이 깜깜하기 때문에 행정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그 동네 나방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학교 안에 가로등이 없고, 주변 인가들도 일찍 소등하다 보니, 학교는 어둠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사람이 문단속을 해야 했기에, 나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손전등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떨리는 손으로 출입문을 닫아야 했다. 새벽에 또 경비가 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문이 잘 잠겼는지 건물 전체를 돌아보는 내내, 심장이 쿵쾅 거리며 밖으로 튀어나올 듯 벌렁거렸다. 혼자서 관사로 가는 길 또한 난관의 연속이었다. 길이 어두워 손전등에 의지해 조심스레 걷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식은땀이 흐르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착각인지 사실인지 구분할 새도 없이 숨이 헐떡 일정도로 서둘러 걸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한적한 시골 밤의 여유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밝음과 어둠,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무대다. 고생 끝에 찾아오는 보람은 마치 폭풍 후 맑은 하늘처럼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힘든 시기를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달가운 보상이 찾아온다. 섬에서의 삶은 고립과도 같았지만, 그 안에는 뜻밖의 힐링이 숨어 있었다. 저녁이면 모임도 없고 서둘러 집에 돌아갈 이유도 없었기에, 바쁜 시기가 아니면 퇴근 후의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퇴근 후, 구불구불 뱀처럼 굽어진 흑산 일주 도로를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위로에 마음이 편안해 지곤 했다. 그렇게 상라봉 전망대에 도착하면, 우리나라 국민가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나를 반겨주었다. 애절한 트로트를 좋아하셨던 엄마가 자주 불러서 익숙한 노래였다. 가사를 곱씹다 보면, 그 시절 내 모습과 오버랩돼서 묘하게 끌렸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

흘러온 나그넨가 귀향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저 서울을 그리다가 /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아가씨'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 눈물짓는 한 여인의 애달픈 마음을 담고 있다.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흑산도의 어린이들이 방학을 맞아 서울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매번 거센 풍랑에 가로막혀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영수 여사가 나서 해군함정을 동원해 서울 구경과 청와대 방문을 성사시켰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흑산도는 정약전이 유배되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그 속에 담긴 감정이 가슴 깊이 스며들어 와닿았다. 흑산도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경은 그리움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황홀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푸른 바다 위에 옹기종기 솟아 있는 작은 섬들, 그리고 수면 위 자윽히 깔린 안개가 어우러지면,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한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바닷물은 푸르다 못해 검푸른 빛이 돌았고, 멀리서 보면 산과 바다가 모두 검게 보인다고 해서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실감 날 정도로, 그 산세는 웅장했고 절경은 숨이 멎을 듯 빼어났다. 내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일주 도로는 검푸른 물결 위에 하얀 비단뱀이 유영하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도로에 불빛이 켜지는 밤이 되면 그 모습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보석 같은 섬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직원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참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낚시도 하고 배를 타고 전복 양식장도 가보며 바다의 풍요로움과 어민들의 숨결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었다. 운동도 같이 하고 흑산도 일주도 같이 하면서 쌓은 기억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착장이 있는 예리항은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였고, 식당도 많고 마트도 있어 장보기 편했다. 홍어와 전복은 물리도록 먹었고, 주말에 집에 갈 때마다 수협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오징어를 사가면 가족들이 엄청 좋아했다. 특히, 아빠가 좋아하셨던 홍어를 한 마리 통째로 사갈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착해서  자주는 아니어도 홍어를 자주 사 가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세월이 어느덧 1년 6개월이 흘렀다. 가지 않을 것처럼 늦장을 부리던 시간도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며 더는 버티지 못하고 흘러갔다. 나는 고대하던 육지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출퇴근하기 멀지 않은 학교로 말이다.

전남에 근무하는 교육행정직은 마치 끊임없이 돌고 도는 시계의 바늘처럼 그렇게 학교를 돌며 지내야 한다. 빨리 떠나고 싶어도 1년 6개월, 더 오래 머물고 싶어도 3년이다. 학교를 옮기는 과정은 마치 환절기 같다. 보내야 하는 계절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계절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는 환절기 말이다. 

새로운 부임지에 가면 또다시 적응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서늘한 가을을 맞이하다 보면 어김없이 기침이 따라온다. 나는 학교를 옮길 때마다 기침처럼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나는 또 내 자리에서 맡은 업무를 수행하며 익숙해지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듯, 몸과 마음도 환절기의 변화에 따라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나는 승진과 발령이라는 양날의 칼 위에 서있다. 승진을 하게 되면 분명 먼 곳으로 발령이 날 텐데 가족들과 떨어져야 하는 상황은 20대와는 완전히 다른 고민이다. 그때는 오로지 내 몸 하나였지만, 지금은 자녀가 있기에 가족과 헤어진다는 상황은 걱정으로 다가온다. 승진을 빨리 하고픈 욕구와 타지로 가야 하는 이별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첫 발령지가 흑산도였는데 어디를 가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다. 그때가 되면 또 어떻게 잘 견뎌내겠지 하면서도 확신은 부족하다. 이 복잡한 감정의 미로 속에서 나는 정답을 찾으려 애쓴다. 

아직 엄마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 둘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우리 가족! 앞으로 상황이 다르게 바뀔지라고 가족이라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든 버텨낼 것이다. 어쩌면 운명처럼 흑산도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강산이 두 번이 바뀌는 시점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기침이 나는 환절기를 거친 다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다 보면 어느새 따스한 봄날도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예전에 다하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의 페이지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나갈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아픈 손가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