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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미학 Aug 03. 2024

엄마의 아픈 손가락

못다 핀 꽃 가슴에 품다..

"창수야!" 

"오메, 내 새끼 창수야!"

"어딜 가블고 안 보이냐... 제발 좀 나와라!"

"어째 나만 두고 가브렀냐.... 아이고~ 아이고~"


엄마는 아들을 찾아 이틀째 바닷가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부서진 나침반처럼 방향을 잃은 채 잠시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아들 이름을 부르며 떠돌았다. 내 자식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새벽이 밝아오자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정신은 희미한 안갯속을 걷는 듯 아득하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옷조차 제대로 차려입지 못했다. 퉁퉁 부운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는 눈물조차 닦을 겨를 없이 절규하듯 아들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무심한 바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삼켜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던 아들이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모든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던 아들이었다. 이제 겨우 11살, 한여름 더위를 식히겠다며 친구들과 수영하러 바닷가에 간다고 해맑게 웃으며 집을 나섰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엄마에게 있어 하나뿐인 아들은 목숨 같은 존재였다. 그 소중한 아들이 어디를 가버린 것인가!


창수 오빠는 바다에 빠진 지 삼일째 되던 날 아침, 마침내 조용히 수면 위에 떠올랐다. 해녀들을 동원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 되어 애타게 찾아다녔지만 끝내 보이지 않더니, 사고 난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더 이상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는 듯 고요하게 떠오른 오빠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슬픔을 더했다. 평소 말랐던 몸은 퉁퉁 부어 있었고 이마에는 큰 혹이 하나 생겨있었다. 친구들과 매일 같이 가던 친근한 바다였건만, 그날따라 잠수를 하다 예상치 못한 급류에 휘말려  머리를 바위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되었다. 


엄마는 아들을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가슴을 짓눌러 숨이 막혀왔다. 축 늘어져 온기라고는 한 점 없는 차디찬 아들의 몸을 감싸 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느껴질 만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안된다! 창수야!"

"정신 차려라! 눈 좀 떠봐라!"

"내가 죽고 너가 살아야제...나는 어떻게 살라고!"

"창수야! 창수야!" 

엄마의 절규가 메아리처럼 바닷가에 퍼졌지만 오빠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다는 모든 비밀을 삼킨 채, 그저 조용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창수가 어떤 아들인가....

엄마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안타깝고 소중한 아들 아닌가..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친정에서도 동생들 돌보느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농사와 집안일에 갖은 고생만 하셨던 엄마였다. 아빠를 만나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아들을 가졌지만, 남편은 군복무로 집을 떠나야 했기에 홀로 키운 아들 아닌가! 변변한 신혼집도 없이 시댁 문칸방에 얹혀살며 시어머니와 형님 눈치를 보며 오빠를 힘겹게 키웠다고 했다. 형님이 먼저 아들을 낳았기에 시부모님 사랑은 모두 형님 아들이 차지했고, 형님의 이간질과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엄마와 창수오빠는 늘 찬밥 신세였다고 했다.


아기 천기저귀를 빨러 형님과 같이 빨래터에 가면, 형님이 양잿물을 나눠주지 않아 엄마는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물로만 헹구고 또 헹구느라 손이 불어 터지도록 빨래를 했다고 하셨다. 추운 겨울에는 얼어붙은 손으로 감각도 무뎌진 채 기저귀를 빨았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친정도 가난하여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남편 없이 아들과 단 둘이 정을 붙이며 눈물과 한숨으로 견뎌야 했던 그 세월이 엄마에게는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했다. 어디 의지할 데 없는 망망대해 속 홀로 솟아있는 외딴섬처럼 외롭고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오빠는 엄마의 외로운 삶 속에 유일한 위로이자 희망이었다. 오빠가 있어 엄마는 힘을 낼 수 있었고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깜깜한 밤을 밝혀주는 유일한 등불이자 삶의 이유였을 것이다. 




어느덧, 아빠가 제대하고 돌아오자,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를 알고는 곧바로 분가하셨다고 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바닷가에서 손수 돌을 날라다 집을 지을 정도로 맨손으로 시작한 살림이었다. 새벽마다 미역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아직 어린 아들과 기저귀도 떼지 못한 막내딸을 집에 두고 나와야 했다고 했다. 혹시나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부모를 찾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갔으니, 일하는 내내 마음 졸이고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초조한 시간 끝에 날이 밝아오면 공장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잠에서 깬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방문을 열면 아기 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모님은 고단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냈고, 고생한 끝에 살림을 일으키고 작은 구멍가게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좀 살겠다 싶었는데,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들을 잃은 것이다. 창수 오빠가 떠나고 집안은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간 것처럼 그야 말고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날마다 술에 취해 사셨고, 엄마는 삶의 끈을 놓은 채 앓아누우셨다. 그 틈에 고작 1학년이었던 언니는 어떻게 지냈는지 밥이라도 제대로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 당시 부모님은 도시로 떠날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하던 시기였는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잃는 슬픔, 가족을 잃는 슬픔, 그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무게로 잴 수 없고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다. 그 건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평생 모를 고통이기에...

아들을 지나치게 엄하게 키운 것을 한탄하며 날마다 술을 드시던 아빠는 간이 망가지며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엄마는 아들의 뒤를 따라 죽는다고 두 번이나 농약을 마셨다고 했다. 자식 잃은 고통을 견디느니 차라리 조용히 눈을 감고 아들 곁으로 가고 싶었을까? 코 끝을 찌르는 역한 냄새를 맡으며 독한 농약을 입 안에 부어 넣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눈물과 콧물이 한없이 흐르며 시야가 흐려지고 심연의 어둠 속으로 빠지는 순간, 해맑게 웃고 있는 아들 얼굴이 떠오르며 비위가 약한 탓에 구역질이 나서 엄마는 차마 농약을 삼키지는 못했다고 했다. 



하루가 마치 일 년처럼 길었을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빠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하셨는지 오빠 사진을 다 불태워버리고 더 이상 창수 생각은 하지 말고 이제는 놓아주자고 마음먹으셨다고 했다. 그렇다고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아들 사진만 보면 눈물이 나서 살 수가 없고, 이렇게 살다가는 가족이 다 죽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리운 아들 사진을 태워버린 아빠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새로운 출발을 염원하는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은 엄마에게 남편의 행동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엄마도 그 선택을 받아들이셨다. 그렇게라도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창수 오빠가 떠나고 부모님은 지금의 오빠와 나를 낳으셨다. 막내이던 언니는 맏이가 되었다. 나는 창수오빠가 세상을 떠났기에 내가 태어났다는 생각을 늘 가슴 깊이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오빠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무거운 짐처럼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오빠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늦은 나이에 자식 키우느라 부모님이 고생을 덜했을 텐데.. 언니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하곤 한다.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언니는 막내로 사랑받으며 도시에서 잘 살았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창수오빠는 뛰어난 수재라 부모님께 효도하며 잘 살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오빠의 몫까지 잘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늘 내 삶을 지탱해 온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오빠가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창수오빠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안방 천장에 걸린 액자 뒤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내가 모르는 친척들이 포함된 대가족 사진이었다.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줬는데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 난 듯 놀라움과 혼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나에게 그 사진을 어디서 찾았냐며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맨 앞에 앉아있는 한 사내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까만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 툭 튀어나온 이마에 인상을 찌푸린 아이... 바로 창수 오빠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창수오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놀고 있는 아이를 사진 찍으려고 억지로 데려와서 표정이 안 좋다고 했다. 엄마가 그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는 오빠 사진을 다 태운 게 아니었다. 차마 아빠도 오빠의 흔적을 다 지우긴 힘드셨을 것이다. 오빠가 남아있는 작은 조각하나는 마음속에 품고 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흐려지는 기억 속 아들의 얼굴이 잊혀지기에 그리움을 붙잡을 사진 한 장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지금 나에게는 1학년과 4학년 두 딸이 있다. 우연인지 필연이지 창수오빠가 떠났을 때 오빠와 언니의 나이와 같다. 그래서 그 나이대 아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공감이 된다. 만약 내 딸들을 잃게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내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공포와 악몽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니 서른 살에 그 참혹한 고통을 겪으신 거다. 나는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련을 견뎌낸 것이다. 


포근한 베이비 향 로션 냄새를 풍기며 둘째 딸은 내 품에 꼭 안겨서 달콤하게 잠을 잔다. 그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함이 사라진다면 나 또한 세상의 온기를 잃어버린 듯 고통 속에 살기 어려울 것이다. 자식이란 나의 인생 아닌가... 그런 자식이 없다는 건 내 인생을 도둑맞은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생을 도둑맞는다면 상실감에 얼마나 허망할까?


겨우 11살!  꿈 많던 그 소년은 이제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누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잊혀진 것이다. 부모님도 안 계신데 누가 기억이나 해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오빠와의 추억도 없고 오빠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 소년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주고 싶다. 기지개 한번 펴보지 못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만 그 여린 꽃송이에게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고마웠다고, 여린 생명이지만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다.

가죽은 쓸수록 닳지만 이름은 쓸수록 빛나지 않은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름이 불리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고 그 이름이 기억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박창수'라는 그 이름을 실컷 불러주고 싶다.  동그랗고 까만 큰 눈이 아른거린다. 오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찡그린 얼굴이 맑게 펴지는 상상을 해본다. 케케묵은 먼지에 묻혀서 빛을 보지 못했던 사진 속 그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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