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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화 Sep 19. 2022

    호박 농사

               

  봄이라고 생각 없이 상추. 들깨. 그리고 호박씨를 고무대야에 파종했다. 햇볕이 잠시 들여다보고 간다. 그것들은 비쩍 마른 아가씨처럼 자라면서 고무대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호박씨 하나 심은 것이 제일 비실댄다. 복합비료를 조금 더 줬다. 며칠 안보는 틈에 쑥 자랐다. 뾰쪽한 더듬이들이 눈먼 장님처럼 길을 찾는다. 예쁘다. 이 좁은 곳에서 내 손바닥보다 더 큰 호박잎들이 진한 초록으로 변하고 있다. 서둘러 지지대를 교차시켜 길을 만들어줬다.

  한가한 휴일이다. 차 한 잔을 들고 베란다 밭 옆 의자에 앉았다. 훌쩍 커버린 호박잎들이 아우성이다. 답답해, 답답해, 외치며 더듬이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다. 무엇 하나 쥐지 못해 이미 혼자 또르르 말려 오그라진 더듬이도 눈에 보인다. ‘더 오를 곳이 없는데’ 걱정에 커피가 다 식도록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창고 곳곳을 열어보며 더 긴 작대기를 찾아본다. 있을 리가 없다. 천정에서 줄을 내릴까 하니, 콘크리트에 무얼 어떻게 단다는 말인지 답이 없다. 베란다 저 아래 공터가 있나 눈으로 열심히 살펴본다. 자리도 없지만 이미 옮겨심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어쩌자고 호박을 이 좁은 베란다 화분에 심었을까. 욕심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쳐다볼수록 답답하다. 내가 잘못했다. 당장 어찌해 줘야 한다. 아무래도 주말과 일요일은 호박넝쿨을 위해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풀지 못한 수학 문제처럼 어렵다. 변변한 땅 한 조각 가지지 못한 호박잎들의 푸념을 모르는 체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하다. 호박의 눈에는 시리게 보이겠지. 바람이 불어와 호박잎이 흔들린다. 마음대로 왔다가는 바람이 부러워 몸을 부르르 떠는 것 같다. 다 식어버린 커피에 얼음 몇 조각을 넣어 저어본다.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주는 순간 호박 더듬이가 흔들리는 것 같다. 그 끝에는 베란다 구석에 고무나무가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만족한 웃음이 피어난다. 일어나서 바퀴 달린 화분 받침대를 호박넝쿨 옆으로 밀어붙였다. 키 큰 고무나무가 호박잎을 내려다보고 있다. 더듬이는 뱀의 혓바닥처럼 고무나무를 향해 날름거린다.

  ‘그래 사람 인(人)자가 왜 이리 생겼는지 아니? 서로 기대어 살라고 이리 생긴 것이야. 너희도 한번 부대끼며 살아보렴. 호박 줄기가 너를 휘감겠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이곳에 누렇게 익은 골 파인 호박이 달릴지 어떻게 알겠니. 물론 가을이 지나면 고무나무 잎이나 가지가 엉망이 되겠지. 하지만 찢어진 상처는 너를 다시 회생시킬 수도 있어. 구석에서 변함없이 서 있는 무의미함보다는 도전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이없는 해석을 두 식물에게 해주고는 돌아섰다. 냉커피가 시원하게 맛있다.

  가을이 기다려진다. 잠시 욕심으로 빚어진 고무대야 화분에 다시 욕심을 더한다. 아니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 아니라 기대이다. 묶어 키우는 개에게서 2세를 기다린다고나 할까.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지나 봐야 하지 않을까. 사소한 욕심은 노랗고 달달한 호박죽을 먹고 싶게 만든다.

 호박넝쿨은 정상을 오르느라 나무를 징징 감고 달리기를 한다. 그중 다른 한 가지는 한가롭다. 원숭이처럼 팔을 쭉 뻗어 고무나무 잎을 잡고 대롱거리며 그네를 탄다. 그 나무도 매일 물세례를 받아 마다마다 새로운 잎이 고개를 내민다. 멀리서 보니 거대한 화분이 되어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니 전쟁터가 되어있었다. 고무나무 새순은 볼이 눌려 찌그러져 삐져나오고 어느 묵은 잎은 호박더듬이에 돌돌 말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재빨리 삼단 빨래건조대를 밀고 왔다. 옆에 세우고 움켜쥐고 말라버린 더듬이를 조심스럽게 풀어 빨래건조대에 감았다. 하나하나 떼어내어 최대한 옮길 수 있는 만큼 넝쿨을 옮겨줬다. 꼭 삼쌍둥이들을 수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박덩굴 더듬이가 힘이 없어 툭 떨어지는 놈은 실로 감아올렸다. 한참씨름을 하고 나서야 바로 옆 빨래건조대 날개에는 옮겨 앉은 호박넝쿨들이 불편한 듯 감겨있다.

 시간은 참 빠르다. 한참 관심 밖이었던 고무대야 채소밭에 시선이 갔다. 상추는 볼품이 없고 들깻잎은 무성하게 달렸다. 깻잎김치 담으려고 큰 잎들을 모두 땄다. 돌아서는데 탁구공만한 호박을 발견했다. 우와! 놀람도 잠시, 손을 대는 순간 톡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워들으니 이미 탄력을 잃어버린 아기 호박이었다. 누렇게 익은 골 파인 호박 따는 기대를 접었다. 가위로 먹을 수 있는 호박잎을 모두 땄다. 그리고 호박넝쿨을 걷었다. 

 식탁위에 깻잎김치와 호박잎 찐 것이 소박하다.  호박잎위에 밥을 한술 놓고 된장찌개를 한술 올렸다. 입을 크게 벌려 한입가득 넣었다. 구수하고 부드러운 호박잎이 맛나다. 작은 호박씨의 운명은 마른호박넝쿨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고 여기서 끝이 났다. 

 이랑을 만들어 골을 파서 비료를 뿌리고, 적당한 때를 골라 씨를 묻고 흙을 덮는 농부들이 생각났다. 풀지 못한 수학문제의 방정식인 듯하다. 어디에 무슨 씨앗이 어울린다는 작은 개념을 이해하면서 가까운 곳에 조그마한 텃밭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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