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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화 Oct 07. 2022

        우중 단상(雨中斷想)

                    

                                                         

  아침에 눈을 뜨니 또 비가 온다. 비는 오다 멈추기를 반복했고 비가 안 오면 산에 갈려는 마음을 비가 와도 산에 가야지로 바꿨다.  무작정 차를 몰고 산으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스틱 대신에 길이가 긴 우산을 꺼냈다. 핸드폰은 비닐봉지에 싸서 가방 안에 넣고 메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후덥지근하다. 시원한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가파른 산 입구 돌계단들을 밟고 올라섰다. 순간 고음의 매미소리가 반긴다. 온갖 풀벌레들이 산이 자기들만의 것인 듯 마냥 소리 지르고 있다.  나도 귀뚜라미처럼 찌르륵 찌르륵 화답했다. 어디서 파도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지팡이로 쓰던 우산을 재빨리 펼쳤다. 비는 작은 북채가 되어 우산 지붕을 빠르게 두드린다. 산길은 어제와 또 다르다. 발아래 딱정벌레나 송충이들이 밟힐까 봐 조심했었는데 오늘은 그들도 숲 어디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가 보다. 등산객은 없고 풀벌레 소리의 향연만 산 길 가득하다.

   정상에 올라오니 비는 멈추고 눈앞 소나무 숲은 안개가 자욱하다. 이제야 아침을 맞은 듯 어깨를 펴고 기지개를 크게 펼쳐본다. 한줄기의 바람이 안개를 흩트리며 달려온다. 다시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어느 빗방울은 높은 도토리 나뭇잎을 두드리고 또 어느 빗방울은 낮은 곳에 산딸기 잎사귀를 두드린다. ‘아! 그래서 빗소리가 집에서 듣는 소리 하고 다르구나.’ 높낮이, 생김새와 두께가 다른 잎사귀들의 작은 하모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선율보다 아름다웠다. 

거기에 까마귀가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른다. 비는 줄기가 되어 함께 화음을 낸다. 그 소리는 아까 들었던 파도소리 같았다.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오롯이 자연의 소리 같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나를 음악회에 초대한 산이 사랑스러웠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지금 순간, 있는 그대로 나를 자연에 던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문명의 껍데기인 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도심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마음을 비운 곳에 나를 정화시킬 신선함을 주섬주섬 담는다.

  문득 번잡한 도시를 버리고 나머지 시간을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숲을 그리워하면서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 도시에서 사는 행복의 값은 얼마일까? 좋은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지나간 시간, 달려온 날들. 돈을 벌어 무엇을 사려고 하였나.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 욕심 주머니를 차고 나오는 것은 아닐까?  채우면 채울수록 더 채우고 싶은 짐. 혹여 그 짐을 어깨에 얹고 예수님처럼 십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걱정과, 끝없이 일어나는 사건들. 늙어서도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순간까지 돈을 좇아가다가 멈추는 삶. 그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살다가 가노라고 이야기하고 갔을까. 먼저 간 사람들은 말이 없다. 결국 내가 떠날 때쯤 혼자 느낄 숙제인 것을.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재바르게 달려서 올라온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고 비옷도 입지 않은 여름 등산복 차림이다. 빗속에서 우산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비웃듯 획 지나가는 모습에 지난날의 나를 발견한다. 훗! 하고 헛헛하게 웃는다. 젊음은 참 좋은 것이다. 나의 과거 속 어느 한 장면에도 저런 모습이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락가락했다. 당연히 그칠 거라고 생각하고 일행은 등산을 멈추지 않았다.  폭우가 솥아 지고 물은 성난 소리를 내며 계곡을 달렸다. 천지에 무서울 것이 없던 나이. 우리는 등산가방을 등에 맨 채로 물에 뛰어들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젊음은 주어진다. 그런 줄 알면서도 다른 이의 젊음을 부러워하는 것은 주저 없이 즐길 수 있는 그 패기를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해간다. 젊었을 때의 삶은 거침없이 뛰어드는 시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인생 고개를 내려갈 때쯤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바라보는 시간인듯하다. 다른 이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지난날의 나를 기억해내는 기억 저장창고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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