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침을 삼키기 힘들 만큼 목의 통증이 계속되더니 열과 근육통까지 밀려왔다. 런던에 있는 내내 맑았던 날씨는 이른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비상용으로 가져온 감기약도 맞춘 듯 똑 떨어졌다. 오늘은 런던을 떠나 밤 비행기로 노르웨이로 들어가는 날이라 하루 종일 긴 동선을 그려야 하는데 하필 이런 날 컨디션이 최악이라니.
체크 아웃을 하고 약국에서 감기약부터 사 먹었다. 저녁에 빅토리아역에서 게트윅 공항으로 가는 익스프레스를 탈 예정이라 빅토리아역으로 이동해 우선 짐가방을 맡겼다. 계획은 먼저 버킹엄궁으로 가는 길에 있는 티룸에 들러 크림티와 스콘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이 계획은 간단히 스킵되었다. 경량 패딩 속에 몸을 꽁꽁 숨기고 버킹엄궁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바로 킵 고잉. 얼른 오늘 일정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버킹엄궁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궁 앞에 다다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모여 있었다. 버킹엄궁 앞에는 빅토리아 메모리얼이 흐린 하늘을 향해 우뚝했다.
빅토리아 메모리얼 꼭대기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넓은 대로인 더몰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윈저성과 캔싱턴 궁전 앞에도 어김없이 있었는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영국을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졌다.
11시가 되자 세인트 제임스 파크 방향에서 기마병들의 행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 위로 쩌렁쩌렁한 구령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소리에 맞춰 기마병과 말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늘씬한 말들의 자태에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이 간지 나고 멋진 기마병들(유럽 말들은 대개 비슷할 테니)을 제압한 몽골의 기마부대가 뜬금없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시추에이션이람.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발로 성큼성큼 걷는 까만 털모자에 빨간 제복을 입은 근위병을 기대했었는데 기마병? 예상 밖의 상황에 남편이 앞에 서 있는 경찰에게 물으니 오늘은 기마부대 행진만 있다고. 이런!
기마병들의 행렬이 눈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도 버킹엄궁을 벗어나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걸으니 저만치 빨간색 공중전화박스가 보이고 그 길 끝에 언뜻 노트르담 대성당과 닮아 보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촤르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빨간색 공중전화박스, 빅벤, 국회의사당, 런던아이, 거기에 흐린 하늘까지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보았던 이미지들이 차례로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컨디션만 좋았다면 공중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거는 시늉정도는 해봤을 텐데.
수많은 역대 왕들과 세계적인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내부는 매우 화려하고 복잡해 보였는데, 사원 안을 꽉 채운 관람객과 외관 못지않은 고딕양식의 화려한 내부 때문인 듯했다. 워낙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장소이다 보니 사원의 내부는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여왕의 무덤도 인상적이었으나 세습된 권위가 아닌 일반인, 예컨대 찰스 디킨스와 뉴턴, 다윈 그리고 2018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의 무덤 또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답답함 때문인지근육통이세게 몰려와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앉고 보니 지난해 찰스 3세의 대관식이 있었던 장소라는 것이 생각났다. 전 세계로 생중계된 화면에서는 꽤 넓게 보였는데 동일한 장소라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사원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조금 전 사원 안에서 청소년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진땀을 빼던 엄마와 아이들이 빅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반갑게 인사하며 사진을 찍어 주고 서로의 안녕과 즐거운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조명따위를 제외한 외관만으로는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화려함의 끝판왕쯤 되지 않을까. 국회의사당 앞으로는 템즈강이 흐르고 강건너편으로 런던 아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