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60대 부부 여행기
*2024.06.02.(일)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조르주 페렉은 ‘런던의 매력은 기념물이나 전망보다 거리, 집, 상점, 사람들에서 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슬로의 매력은 어디에서 올까. 뭉크를 빼고는 상상할 수는 없는 도시 오슬로. 뭉크가 보았던 핏빛 노을과 그가 걸었던 칼 요한 거리를 걷고 싶었다.
지난밤 오슬로 중앙역에 내린 시간이 밤 10시 30분. 숙소는 중앙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였지만 체크인을 위해서는 먼저 숙소를 관리하는 회사에 들러야 했다. 구글맵으로 회사 위치를 확인 후 가방을 끌고 오슬로의 밤거리를 걸었다. 거리에는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체크인 시간이 늦어 메일로 안내해 준 방법에 따라 핸드폰에 앱을 설치한 후 회사 앞에 설치된 무인함에서 숙소의 열쇠를 꺼낼 수 있었다. 이제 인근에 있는 숙소만 찾으면 되는데 잠시 머릿속이 버퍼링 되면서 좀처럼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여성 노인 한 분이 다가와 도와줄까 물었고 숙소를 찾고 있다는 말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자녀로 보이는 두 사람을 불렀다. 우리를 도와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주소를 확인하더니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에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이 건네는 친절이 고맙긴 했으나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을 본 후 조금 안심이 되었는데 어머니의 이런 친절이 자주 있는 듯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남편과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세 사람은 마을 길로 들어서더니 한 건물 앞에 서서 손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구글맵은 정확하게 숙소 앞에 도착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들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니 아파트 단지인 듯했다. 안뜰이 잘 정리되어 있어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칼 요한 거리는 오슬로 중앙역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중앙역에서 노르웨이 왕궁까지 1.5km 남짓 쭉 뻗은 길이 칼 요한 거리로 노르웨이 왕궁과 시청사 등이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어제까지 있었던 베르겐과는 달리 6월의 오슬로는 따뜻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햇살이 부서지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서 한껏 여유가 느껴졌다.
뭉크의 작품 중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에는 첫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에 이은 남동생의 죽음,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의 미래에 대한 뭉크의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엔가 크게 놀란 듯한 표정의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무리 지어 걸어오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중앙에 등을 돌린 채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이 뭉크다. 맨 오른쪽 형태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는 나무를 그린 것이지만 거대한 그림자로 보였다. 한 평론가는 ‘뭉크의 작품에서 그림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공포를 나타낸다’고 했다.
칼 요한 거리를 걸었다. 오슬로 대성당을 보고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자 뭉크가 자주 드나들었던 160여 년 된 그랜드카페가 보였다. 이어 도리아식 기둥을 가진 오슬로 대학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1911년 뭉크는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공모전 작가로 선정되어 5년 후 그의 작품들은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면에 걸리게 된다. 노르웨이 지폐 1000 nok 앞뒷면에는 뭉크와 이 벽화의 작품 <태양>이 들어 있다.
오슬로 대학의 문이 열려 있어 캠퍼스를 잠시 걸었다. 화창한 대낮의 칼 요한 거리에서 백여 년을 거슬러 평생 불안 속에 살다 간 뭉크를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겨울 혹은 흐린 날의 오슬로는 어떤 빛깔일까.
오슬로 대학 맞은편 노르웨이 국립극장 앞에는 세계적인 극작가 입센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의 작품 <인형의 집>은 10대 후반에 읽어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주인공 로라와 로라가 앉아 있던 어떤 공간의 쓸쓸함은 지금도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 있다.
오슬로에서는 뭉크와 입센을, 베르겐에서는 그리그를 생각했으니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인물 세 사람을 모두 만난 셈이다.
길은 완만한 경사로로 이어지며 양옆으로 넓은 숲의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경사로 끝에는 왕이 거주하고 있는 노르웨이 왕궁이 있었고 왕궁 앞에서 뒤를 돌아보자 방금 지나온 길 위로 숲과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왕궁 앞 광장 중앙에는 스웨덴의 왕 칼 요한 14세의 청동 기마상이 있었는데 약 100년간 스웨덴의 통치를 받았던 노르웨이의 왕궁 앞에 스웨덴의 왕이라니. 게다가 메인 스트리트의 이름도 칼 요한 아닌가.
400여 년간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던 노르웨이는 이어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당시 스웨덴의 왕이었던 칼 요한 14세는 외교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치권과 함께 노르웨이 헌법도 그대로 인정했다고 한다. 1875년에 세워진 청동 기마상이 현재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 고마움에 대한 표징일 테지만 왕궁 앞 정중앙이라는 위치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노르웨이는 1905년에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했다.
왕궁에서 내려와 시청사로 가는 길에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트롤 인형을 파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트롤의 거친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붉은 벽돌의 오슬로 시청사는 그간 보았던 유럽의 시청사들과는 달리 소박했다. 휴일에는 결혼식 장소로 무료 대관을 한다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에도 결혼식이 있었다. 시청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오는 넓은 홀이 노벨평화상 시상식 장소이다. 넓은 홀의 벽면을 채우고 있는 벽화들은 노르웨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특히 노동자들을 그려 넣은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시청사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아케르브뤼게 부두로 나왔다. 부두에는 대형 크루즈도 정박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부두에 연해 있는 노벨평화센터에 입장하기에 앞서 오슬로 패스를 오픈했다. 숙소를 출발하기 전에 앱을 통해 24시간짜리 오슬로 패스를 구입해 두었다. 24시간 패스 가격은 한화로 약 68,000원 정도인데 오슬로에 있는 뮤지엄과 교통수단을 대부분 이용할 수 있다. 오늘은 노벨평화센터와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을, 내일 오전에는 뭉크 미술관까지 알뜰하게 사용할 계획이다.
노벨평화센터에서 김대중대통령을 만났다.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실팍한 무게로 느껴졌다. 마더 테레사, 마틴 루터킹, 달라이 라마 등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인물들이 노벨평화센터를 채우고 있었다.
노벨평화센터 뒤로는 2022년 재개관한 북유럽 최대 규모의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에는 고흐, 세잔, 피키소, 모네를 비롯해 엘 그레코, 마티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들과 북유럽 작가들, 그리고 표현주의 작가인 에밀 놀데와 키르히너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을 압도하는 것은 뭉크의 작품들이었다. 82세에 사망하기까지 3만점에 가까운 방대한 작품을 남긴 뭉크의 작품들은 뭉크 미술관을 따로 지어 옮겨 갔음에도 <절규>의 첫 번째 버전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여전히 국립박물관에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뭉크의 작품 중 그의 두 번째 연인이었던 다그니 율을 모델로 한 <마돈나> 앞에 섰다. <마돈나>는 대게 성스러움과 관능적 요소를 둘 다 갖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마돈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성스러움보다 관능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뭉크의 첫 연인 밀리와의 사랑을 그린 <키스>도 발길을 붙들었다.
뭉크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고 자신의 노트에 적었다. 그러니 그의 작품은 속에서 농익어 나온 표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 작품들 앞에서 왜 클림트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으나 클림트의 <유디트>와 <키스>가 박제된 아름다움이라면 뭉크의 <마돈나>와 <키스>는 실존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뭉크는 다섯 살에 폐렴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의지했던 누이 소피에마저 15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자 소피에의 병상을 여러 작품으로 남겼다. <아픈 아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죽음이 느껴지는 숨죽인 고요 속에 깊은 슬픔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소재로 다룬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이곳 박물관에도 있었는데 부녀지간인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아버지)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딸)의 작품이 한 공간에 걸려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재를 다룬 작품 중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를 꼽는다. 그런데 젠틸레스키의 다른 버전과 아버지의 작품을 나란히 보다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어느 것이 딸의 작품인지 고르라면 단번에 찾아낼 수 있다. 유디트의 표정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남은 에너지의 한 방울까지 탈탈 털린 채 박물관 문을 나섰다. 그림을 보는 일은 늘 설레게 좋으면서도 에너지의 고갈을 막을 수 없다.
오슬로 피오르를 품은 아케르브뤼게 부두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더 늘어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주저 없이 숙소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