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60대 부부 여행기
*2024.06.02.(일)
친구 두 명과 함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의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우울감에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조이는 통증을 느꼈다.
나는 멈춰 섰고,
죽을 것같이 피곤해서 나무 울타리에 기대고 말았다.
검푸른 피오르와 도시 위로 핏빛 화염이 놓여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흥분에 떨면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해서 들려오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
(뭉크의 노트. 1892)
에케베르그 언덕에서 하늘을 뒤덮은 노을을 본 후 뭉크는 이렇게 적었다. 핏빛 노을 아래에는 검푸른 오슬로 피오르가 꿈틀거렸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의 배경이 된 풍경이다.
오슬로 피오르가 보이는 에케베르그 언덕 근처에는 어머니와 누나를 떠나보낸 장례식장이 있었고, 인근 정신병원에는 여동생 라우라가 있었다. 그를 평생 옥죄었던 죽음에 대한 극한의 불안과 공포가 그의 글과 작품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뭉크가 보았던 그 노을을 보고 싶었다. 핏빛 화염이라니.
노르웨이 국립박물관을 나와 숙소 인근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봤다. 여행하는 지역의 로컬맥주를 맛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라 노르웨이 맥주와 체리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바야흐로 체리의 계절이었다.
숙소가 있는 아파트에는 주민들이 가끔씩 오갈 뿐 조용했고, 무지개 깃발을 내 건 발코니도 여러 곳 보였다. 하루 해걸음이 긴 것은 여행자에게 분명 매력적인 것이지만 자정이 가까워야 해가 지는 6월의 오슬로에서 노을을 보는 일은 긴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해가 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밤 10시를 지나 숙소를 나와 오페라 하우스 방향으로 걸었다.
오페라 하우스는 피오르 위로 떨어지는 노을을 보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바다로 향해 있었고 이 길의 끝에서 오슬로 피오르와 만나게 될 것이다. 길은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와 나란히 나아가다 길 끝에 이르자 오슬로 피오르가 다가섰다.
피오르에 떠 있는 빙하를 모티브로 설계된 오페라 하우스는 건물의 한쪽 면이 바다에 잠겨 있었고 해수면부터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까지 오르는 길은 하얀 대리석으로 된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옥상 난간에 붙어 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사면을 따라 옥상에 오르자 도시의 낮은 스카이 라인 덕분에 하늘이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노을을 기다렸다. 오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지만 한 순간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허물며 붉은 화염 같은 노을이 찾아오리라 기대했다. 이윽고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멀리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먹구름이 모인다 싶더니 거대한 빗줄기가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놀라 일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의 강세라면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올 게 분명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거대한 빗줄기를 본 사람들은 서둘러 옥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춤거리고 섰던 남편과 나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2024.06.03.(월)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쨍하게 맑고 비는 흔적도 없었다.
아침 햇살 속을 걸어 뭉크미술관으로 향했다. 뭉크미술관 앞으로 펼쳐진 피오르는 햇살이 뿌려 놓은 윤슬로 반짝였다.
단일 미술관만큼 작품을 감상하기에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뭉크미술관은 단일 작가에게 헌정된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으로 꼽힌다. 국내만 해도 김환기 미술관이나 장욱진 미술관에서 작품을 넘어 작가와 얼마나 깊게 만났던가. 그런 경험은 오래도록 향기를 남긴다.
"열망한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 불꽃들이 소멸하지 않고 불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를."
(뭉크의 노트. 1933년)
3만 점에 가까운 작품 수가 증명하듯 뭉크는 자신이 쓴 글처럼 살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자신의 작품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증하면서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돼 작품들을 압수당할 뻔한 수모도 피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의 삶이 영사기 필름처럼 촤르르 지나갔다. 5살의 어린 뭉크가 마주했던 어머니의 죽음, 그 후 종교에 심취한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자주 읽어줬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어린 뭉크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잔뜩 웅크린 어린 뭉크가 보였다. 아버지로부터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고 한 뭉크는 그림에 몰두하며 자신의 내면에 똬리를 튼 불안과 광기의 기운을 다독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뭉크는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리만치 작품 속에 녹여 넣었다.
“나에게 그림은 인생의 아픔과 회복의 기록이다” (뭉크)
작품 <이별>, <마라의 죽음>, <뱀파이어>, <질투> 앞에서 뭉크의 사랑을 생각했다. 그의 삶에 세 번의 사랑이 찾아왔고 사랑은 늘 뜨거웠지만 질투와 배신으로 얼룩지기도 하며 번번이 상처와 좌절로 끝을 맺었다. 사랑은 깊은 상처가 되어 그의 작품 속으로 스며들었다.
3가지 버전의 <절규>를 소장하고 있는 뭉크미술관은 세 작품을 30분 간격으로 번갈아 공개하고 있었다. 한 연구원은 이 작품의 제목인 <scream>을 ‘절규’가 아닌 ‘비명’으로 번역해야 적절하다고 했다. 대자연을 관통해 들려오는 비명을 들은 후 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뭉크는 대자연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있다.
미술관 6층에는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와 같은 버전의 대작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7층에는 그가 쉰두 살이던 1916년부터 1944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에켈리의 별장을 재현해 놓았다. 그리고 그가 사용했던 화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은 오후로 훌쩍 넘어가 있었다. 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커피와 빵으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평생에 걸친 죽음에 대한 공포, 신경증, 불안,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과 욕구, 집중력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던 뭉크였다. 그의 작품은 살아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고 했던 뭉크의 마음을 온전히 품고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어젯밤 노을을 기다렸던 오페라 하우스 앞을 지났다. 눈이 부실만큼 강하고 투명한 햇빛이 하얀 대리석의 오페라 하우스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와 대비를 이룬 시리도록 파란 피오르에는 성급하게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도 보였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해변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오슬로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아케르스후스 요새와 만나게 된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나오는 아렌델 왕국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요새 안으로 들어서니 도심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절된 느낌이 들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성채는 단단해 보였다. 피오르가 훤히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요새는 지난 수세기 동안 오슬로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요새 안에는 왕실 행사에 쓰이는 예배당을 비롯해 군사 박물관 등이 있었고 총리의 임시 사무실로도 사용된다고 했다.
성곽 너머로 아름다운 피오르 해안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두 분 사진 찍어 드릴까요?”하는 한국말이 들렸다. 돌아보니 20대로 보이는 서양 여성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말을 어쩜 그리 잘하냐고 물으니 한국에 잠깐 있었다고 했다. 언어란 이런 것이구나. 여러 말이 섞여 있어도 거리와 공기를 뚫고 그대로 귀에 꽂히는 모국어의 힘이라니. 그녀는 여러 장 사진을 찍어 주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일행 속으로 들어갔다.
요새에서 나오고 보니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비겔란 조각공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여유 있게 일정을 짜느라 비겔란 공원은 일정에서 뺏는데 마침 다녀올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 런. 데
비겔란 공원으로 가는 버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어? 버스가 숙소가 있는 지역을 지나갔다. 비겔란 공원은 숙소와 반대쪽인데 아뿔싸!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탄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건너편 정류장에서 확인해 보니 중앙역으로 가서 환승을 해야 했다. 하는 수없이 다시 버스를 타고 환승하기 위해 내렸는데 급 피로감이. 비겔란은 우리와 인연이 없는 것이야. 숙소로 돌아가 쉬라는 뜻인 게야 끄덕이며 미련 없이 숙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