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원시적이고 장대한! 송네피오르

노르웨이-60대 부부 여행기

by 나무


*2024.06.01.(토)


아침 8시 베르겐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미리 확인해 두었던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선착장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곳에서 8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약 5시간 동안 송네피오르를 여행한 후 산악열차와 일반기차로 환승해 밤 10시 30분쯤 오슬로 중앙역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송네피오르는 길이 204km, 수심 1300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피오르로 베르겐에서 송네피오르를 여행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베르겐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풀롬까지 5시간 동안 송네피오르를 보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베르겐에서 기차를 이용해 보스까지 가서 버스로 환승한 후 구드방엔에 내려 배를 타고 2시간 동안 보는 방법이다. 전자를 택한 이유는 환승 문제였다. 무거운 여행 가방과 함께 이동해야 하는 데다 가방 분실이나 도난의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비교적 안전하다는 북유럽이지만 낯선 곳에서의 변수를 누가 예측할 수 있으랴.


배는 8시 정각에 베르겐을 출발했다. 북해를 가르며 나아가던 배는 내륙 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송네피오르로 들어섰다. 배가 피오르로 들어서자 바다 양 끝으로 산들이 겹겹이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따라왔다. 해발 수백 미터에 달하는 산들은 허리까지 차오른 푸른 숲들이 무색하리 만치 산마루에 하얗게 빙하를 이고 있었다.



산과 한 몸이 되어 있던 빙하가 수 천년 전 서서히 녹아내리며 깎아 만들어 낸 피오르. 그곳으로 바다가 밀려 들어와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봉우리마다 각각의 산이 되었을 테고 산들은 바다 깊숙이 발을 묻었을 것이다. 산 아래 물과 만나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그림 같은 마을들이 펼쳐졌다.



배는 산과 화강암 절벽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피오르 깊숙이 들어 갈수록 바다의 폭은 좁아졌고 멀리 신기루 같았던 절벽과 산들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간간히 절벽 위에서 하얗게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갑판 위로 나와 대자연의 웅장함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고 수십억 년의 시간이 자아내는 아우라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되었다.



수많은 폭포를 지나던 배는 두 개의 폭포 앞에서 멈췄다. 배는 폭포의 발치까지 다가섰고 이내 배의 시동이 꺼졌다. 그러자 사방이 폭포소리로 가득 찼다. 높이 575m의 레그다포센 폭포는 바다를 향해 엄청난 소리를 토해내며 수백 미터를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이명처럼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5시간을 넘게 항해한 배는 피오르가 만든 아름다운 마을 플롬에 닿았다. 부두에는 거대한 크루즈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오후 4시 15분 산악열차를 타기까지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어 락커에 여행 가방을 보관하고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크루즈에서 내린 관광객들까지 몰려 항구와 식당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사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다가 정수기 옆에 비치해 놓은 유리컵들이 눈에 띄었다. 일회용품 사용에 대한 규제가 있는지, 자발적 실천인지 모르겠으나 스테인리스 컵이 아닌 유리컵이라니. 조금 더 대접을 받는 기분이랄까.



점심을 먹고 바람도 쐴 겸 식당가 뒤쪽으로 돌아가니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푸드트럭과 부스 형태의 간이매대 그리고 아트 마켓이 서 있었다. 마침 쿱이 있길래 초콜릿과 물을 사서 벤치에 앉으려니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6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자리에 3인 가족이 앉아 있어 혹시 같이 앉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함께 앉아 준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말하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런 스윗한 멘트라니! 좀 배우고 싶지 말입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본격적으로 빙하가 녹기 시작하는 계절 6월인 것이다.


길 끝으로 크루즈가 보인다

여유 있게 가방을 찾아 산악열차를 타러 승강장으로 갔는데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탑승해 있었다. 창가 자리는 거의 다 차 있었고 남편과 동석할 자리도 마땅히 없어 열차 뒤쪽으로 이동해서야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백인 노부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미국에서 왔다며 우리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반대쪽 창가에 앉은 노부부와도 아는 걸 보니 단체여행 중인 듯했다.


열차는 해발 880m에 있는 뮈르달역까지 1시간 동안 올라가게 된다. 열차가 완만한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 양옆으로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만든 계곡은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갔다. 흡사 알프스를 연상시켰다. 멋진 풍경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창에 붙어 사진을 찍느라 열차 안은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 산악열차의 하이라이트는 효스폭포. 열차는 효스폭포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열차에서 내렸다. 폭포 감상을 위해 딱 5분간 정차를 하는데 이게 또 스릴 넘치는 시간이라 빠르게 내려서 보고, 찍고, 감상까지 쓰리 콤보를 5분 안에 마치고 승차해야 하는 것이다. 양옆의 노부부는 손사래를 치며 우리 더러 다녀오라고 했다.


해발 670m에 위치한 전망대 바로 앞으로 거대한 폭포가 엄청난 수량과 굉음을 토해내며 93m 높이에서 쏟아져 내렸다. 폭포가 일으키는 물보라는 일시에 사람들을 흠뻑 적셨다. 물보라가 만들어낸 빛의 파동으로 폭포 앞에는 무지개가 떠올랐다. 폭포는 플롬계곡 위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레이눙가 호수에서 떨어져 내린다고 했다.



물에 흠뻑 젖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던 찰나, 폭포 중간쯤 되는 오른쪽 바위 위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요정이 나타났다. 이내 폭포소리를 뚫고 음악이 흘러나왔고 요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신화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요정 훌드라의 재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밤 마을에 신비로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며 요정이 나타나 마을 목동들을 유혹해 함께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노르웨이 발레 스쿨의 학생들이 요정으로 분해 재현하는 짧은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재빠르게 열차에 올라 자리로 돌아오니 노부부가 웃으며 흠뻑 젖은 남편에게 땀을 많이 흘렸네요, 한다. 그 위트에 함께 웃었다.


해발 880m의 뮈르달 역


산악열차의 종착역인 뮈르달역에 내렸다. 오슬로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 역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물을 구입해 오슬로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을 마주했다.


플롬에서 뮈르달까지 올라오며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시적인 대자연이 만들어 내는 적막하고 장대한 풍경에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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