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영화 상상 혹은 데자뷰. 스톡홀름

스웨덴-60대 부부 여행기

by 나무

*2024.06.05.(수)


스톡홀름 숙소는 컨디션부터 가성비까지 나무랄 데 없이 흡족했다. 우리가 묵었던 북유럽 숙소들은 샤워부스가 있는 쪽 바닥에 따뜻하게 불이 들어왔다. 온돌문화에 익숙한 한국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눈이 동그래지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으로 전해진 온기는 다정하게 건네는 환영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또 하나, 숙소에 프런트가 없는 경우 열쇠를 넣어 둔 키박스의 비번을 받아 열쇠를 찾곤 했는데 스톡홀름 숙소였던 호텔형 레지던스는 실물 열쇠 없이 ‘VANDER’라는 앱을 이용해 모든 출입문을 열 수 있도록 했다. 미리 이메일로 이용 방법을 받긴 했으나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실제 해보니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빠른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장벽이 높아 보였다.


열쇠를 대신한 밴더앱

아닌 게 아니라 인근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돌아오니 호텔 입구에 70대로 보이는 백인 부부 일행들이 폰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앱을 이용해 문 여는 것을 보여주자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겠지. 음식점에서 주문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돈이 있어도 주문을 못하고 돌아선다는 노년층 얘기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노르웨이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브라운치즈

도착한 다음 날 오슬로에서 구입한 브라운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 하루 센트럴역에서 시작해 스톡홀름 이곳저곳을 쏘다녀 볼 예정이다. 일명 도시탐험이랄까. ‘낯선 도시에 가면 눈앞에 보이는 모습 너머에 쌓인 세월의 나이테를 들추어내고 또 곱씹어야 한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도시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센트럴역에 내려 운하를 따라 시청사 방향으로 걸었다. 간간히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갔고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과 카누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윽고 멀리 붉은 벽돌로 지어진 스톡홀름 시청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8만 개가 넘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시청사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청사라는 찬사도 받고 있는데 특히 아치형 열주가 인상적이었다.



시청사 앞에는 넓은 정원과 발트해로 이어지는 멜라렌 호수가 찰랑거렸다. 맞은편에는 쇠데르말름섬 언덕이, 왼쪽 건너에는 올드타운인 감라스탄이 보였다. 하얀 뭉게구름과 투명한 바람, 사방으로 내려앉는 햇살과 윤슬이 번진 수면까지 그 속에 있으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공원 한쪽에는 15세기 덴마크 왕의 폭거에 저항해 일어났던 민중봉기의 영웅 엥겔브렉트손의 동상이 서 있었다.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그는 살해당했지만 저항 정신을 일깨워 준 위대한 영웅으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시청사 앞을 벗어나 센트럴역을 가로질러 세르옐 광장에 막 도착했을 때 호루라기와 나팔, 크락션 소리까지 광장 앞 도로가 일제히 소란해졌다. 차 여러 대가 회전 도로를 달리며 내는 소리였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엔딩신에서 보았던 고등학교 졸업 장면이 생각났다. 오! 바로 그 장면을 리얼타임으로 보게 된 것.



졸업식을 마친 녀석들은 차에 나누어 타고 도심을 돌았다. 그들은 아슬아슬 차창 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고 앉아 깃발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경찰차가 나타나 녀석들의 차를 잡아 세우기 시작했지만 다른 도로에서도 연이어 튀어나오는 요란 벅적 카퍼레이드를 막을 도리는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섰는 시민들의 표정 또한 익숙한 듯 즐거워 보였다.


세르옐광장과 이어진 번화가를 걸어 스톡홀름 콘서트홀(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곳) 앞에 있는 해산물 전문식당을 찾았다. 점심으로 피시 수프와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셀프서비스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라 가성비가 좋아서인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세르옐광장 인근에 있는 왕의 정원에서 다리를 건너면 올드타운인 감라스탄이 있는 섬으로 이어진다. 옛 도시라는 뜻을 가진 감라스탄은 그 의미에 걸맞게 13세기부터 형성된 도시라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로와 거리,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다리를 건너 근위병 교대식이 한창인 왕궁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자 감라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스톡홀름 대성당이 있었다. 15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는 북유럽을 상징하듯 붉은 벽돌이 많이 보였다. 현재는 루터교 교회로 왕실 공식 행사 때 이용되는 왕실 부속 교회라고 가이드북은 적고 있다. 남편과 잠시 앉아 기도를 했다.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몇 보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감라스탄의 중심인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이 있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미디어에 가장 많이 등장한 바로 그 노벨박물관이 있는 광장이다. 1520년 덴마크에 의해 스웨덴 귀족 100여 명이 처형당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장 가운데에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분수가 있었다. 사건 당시 분수에서는 핏물이 흘렀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덴마크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며 결국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독립을 이루게 된다.


광장과 이어진 골목길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상을 찾아가다가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에서 잠시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작은 문이 있는 담장 안에서 마침내 동상을 발견했다. ‘아이언 보이’라는 주먹만 한 크기의 동상은 누군가 만들어 준 작은 털모자를 쓰고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동상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아였던 소년은 스톡홀름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하며 자기보다 어리거나 또래의 고아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하지만 소년은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감라스탄의 한 골목에서 끝내 숨지고 만다. 동상은 소년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동전을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행운과 지혜를 안겨준다고 해서인지 소년의 머리는 금빛으로 반짝였다.



골목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어느새 광장으로 다시 돌아와 있곤 했다. 어느 골목 끝에서는 내달으면 풍덩 빠질 것 같은 바다가 찰랑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폭이 좁다는 90cm 골목길을 지나 감라스탄을 쏘 다니다가 바다 옆에서 TV 여행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적 있는 청어튀김으로 유명한 푸드트럭을 만났다.



청어 튀김은 소금에 절여 살짝 발효를 시켰는지 특유의 노린내가 났다. 푸드트럭 앞 간이 테이블에서 청어 튀김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테이블에 꽂혀 있던 파라솔이 뽑히며 건너 테이블에서 청어 튀김을 먹고 있던 중년 남성의 머리를 쳤다. 순간 남성은 바닥으로 쓰러지며 자신의 머리를 잡고 굴렀다. 너무 놀라 괜찮냐고 물었는데 괜찮다며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응? 허리우드 액션?


푸드트럭 앞으로 예술가들의 섬이라는 쇠데르말름섬과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였다. 섬으로 건너가 마을길을 걸으며 보니 여러 갤러리와 스튜디오들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하늘 때문인지 도시의 색은 한층 더 깊고 짙게 느껴졌다. 절벽 옆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에 이르자 시야가 열리며 스톡홀름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스톡홀름을 사진 한 장에 다 담을 수 있을 것처럼.


풍경이 주는 서정이란 이런 걸까. 순간적으로 멜랑꼴리 해진 기분이 몸속 세포까지 스며드는 느낌.



쇠데르말름 전망대에서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고 김치를 사러 다녀오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4주쯤 되자 김치찌개가 몹시 생각났는데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 구글링을 통해 찾은 김치매장이 마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확히 구글맵으로 도보 11분을 가리켰다.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서 생각해 보니 숙소에 들르지 않고 바로 다녀오는 게 났겠다 싶었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는데..


이럴 거였으면 김치매장 인근 역까지 가서 내리면 될 것을 숙소가 있는 역에 내리는 바람에 험난한 여정이 되고 말았으니. 처음에는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신나게 걷다가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완만하기는 했으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길을 40여분을 걸어 도착했다는 결말.


김치 사러 가는 길
김치 매장앞 바다에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그렇게 찾아간 매장은 서울김치라는 작은 간판을 달고 있었다. 위생모를 쓴 한국 중년 여성이 반갑게 맞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매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20대로 보이는 스웨덴 여성 둘이 들어와 김치를 골랐다. 현지인들에게도 김치가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매장 앞은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는 바다였다. 문득 영화 <카모메식당>이 떠올랐다.

김치매장에서 사 온 김치와 라면, 떡볶이, 떡볶이양념, 고추장. 하~ 얼마만에 먹어보는 빨간맛 김치찌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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