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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Jan 03. 2024

호모 깜빡스

고치고 싶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인류의 기원을 배웠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호모 에릭투스 – 호모 사피엔스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원숭이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조금씩 허리를 펴고 좀 더 현생 인류와 가까워지는 교과서 속의 그림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당시 우리는 친구를 놀릴 때 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상님에게 참 무례했다.

 




진화 단계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각 인류명의 뜻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어 옆에는 괄호가 쳐져 있었고 ‘슬기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우리말 번역은 무엇일까? 덧셈, 뺄셈보다 쉬운 문제이다. 정답은 ‘슬기 슬기 사람’.

 




최근까지도 인간을 설명할 때 호모 000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인간은 놀이하는 특성이 있다고 하여 ‘호모 루덴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여 ‘호모 파베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단어들을 쭉 생각해보다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인간이 공통 조상에서 진화했다지만 한 단어로 모든 인류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호모 0000’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를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 나를 설명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찾기 어려워 나만의 단어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호모 깜빡스’다. 사소한 일과 중요한 일을 가리지 않고 깜빡할 때가 많다. 어렸을 때 물건을 너무 자주 잃어버렸다. 엄마께서는 모든 물건에 내 이름을 써주셨다. 교과서, 연필, 지우개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방에도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매번 물건을 잃어버렸고, 지금도 여전하다.

 




성인이 됐다고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깜빡하는 특성은 DNA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듯 하다. 내가 ‘호모 깜빡스’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비싼 물건을 사지 않는다. 결국 사라질테니까...





여자친구가 군대 전역 선물로 ‘마르지엘라’지갑을 사주었다. 비싼 지갑이라서가 아니라 전역한 남자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 준 마음 자체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여자친구에게 약속했다.

 




 ‘호모 깜빡스’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한다. 물건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지하철을 내려 카드를 찍고 나가려고 하는데 주머니에 지갑이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역무원분을 불렀다.

"죄송한데, 지갑이 없어졌어요. 혹시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

임시문을 통과해 그와 함께 역무실로 들어섰다. 역무원께서 어느 역, 어느 위치에서 지하철을 탔는지 묻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국 지갑을 찾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펑펑 울고 말았다.




‘호모 깜빡스’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주 깜빡하다 보면 돌발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예상치 못한  일을 자주 마주하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다. 얼마전 선생님들을 위한 공개 수업을 준비했다. 전날까지 집에서 PPT 자료를 보완하고 USB에 저장하여 완벽히 마무리한 상태였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서 가방을 열자, 기분이 싸해졌다. 아무리 뒤져도 USB가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작업 후, 그대로 컴퓨터에 꽂아둔 것이다. 옆반 선생님께 사실을 알리자, 오히려 나보다 더 걱정해주셨다.

"어?? 어떡해 그럼?? 아유, 큰일이네.. 이를 어쩌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요. 저에게는 흔한 일이랍니다."

전날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 다시 PPT를 만들었다. 다행히 공개 수업도 만족스럽게 마무리했다.

 





진화는 영겁의 시간이 걸린다는데, 이번 생에 ‘호모 깜빡스’를 벗어던지고 진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호모 깜빡스’로 사는 생활이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이젠 좀 더 꼼꼼하고 치밀한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매일 저녁을 먹고 난 뒤, ‘기억력 오메가3’를 한 알씩 먹고 있다. 이제 거의 1년을 먹었는데 큰 효과가 없다. 두 알씩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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