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추락한 새 한 마리는 그대로 날지 못하고
“독수리를 그려보세요.”
새하얀 A4 프린트지에는 새를 그려보라는 제시문 아래로 사각형 틀이 인쇄되어 있었다. 독수리 사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독수리가 어떻게 생겼었지. 시간은 앞선 시험보다 훨씬 촉박했다. 단순 소묘인 탓일까. 또 옆에서 연필 선을 긋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단 나뭇가지를 하나 그린 뒤 얼굴과 몸통을 나눠 원형의 덩어리를 그렸다. 그런데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독수리가 어떻게 생겼더라. 조류 공포증이 있는 나는 독수리 말고 다른 새라도 기억에 남을 만큼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대강 어떤 새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독수리는 아닌 새가 그려져 있었다. 날개와 얼굴의 비율은 엉망이었고, 음영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또다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다.
허망한 가운데 시험이 끝나 자기 자리를 직접 청소하게 했다. 교실 앞에다 종이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길,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들어 바라보자, 손 끝에 든 수험표를 보이며 경고했다.
“수험표를 여기다 버리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버린 게 아니었다. 그저 실수였다. 그런 실수는 잘 하지도 않는 내가 무슨 정신으로 수험표까지 버렸을까. 수험표 속 웃고 있는 증명사진의 내가 미워졌다. 웃을 때가 아니야. 지금 모든 시험이 다 망해버렸다고, 알아?
이번에는 시험관에게 제출하는 형식이 아니었다. 그 그림을 들고 책상이 많고 넓은 어느 곳으로 가 수험자가 직접 그림을 올려두게끔 했다. 아이들을 줄 세워 그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손에 들려 희끗희끗 보이는 종이에는 새카맣게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만 못 그린 게 아닐 거야.
“여기다가 차례로 한 명씩 두세요.”
상 위로 그림이 일렬종대를 이뤘다. 차마 그 그림을 두고 가기 싫었다. 그 용지 위에 내 이름이 적힌 게 싫었다. 모든 아이가 내 그림만 바라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너무 부끄러웠다. 3차는 없겠구나. 반쯤 허탈한 심정으로 교문 밖을 향했다.
실내화 주머니에서 내 신발을 꺼냈다. 차가워진 신발 속에 발을 급하게 욱여넣다가 뒤꿈치가 굽어진 상태로 신어버렸다. 뒤꿈치를 좀 빼야지, 하고 허리를 굽힌 순간 패딩 안에 있던 동전들이 빠져나와 하수구 옆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거기서 나는 엉거주춤 움직이며 혹여나 500원이라도 들어갈까 봐 허겁지겁 주웠다. 손끝은 빨개져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모든 게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하수구 옆에서 동전을 줍는 신세라니. 어찌저찌 모두 줍고, 신발도 추려 신은 후 허리를 들어 앞을 보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정문 울타리 바로 앞에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서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시험 결과를 들어보지도 못해놓고 그렇게까지 활짝 웃는다니. 나는 전부 망치고 나왔는데, 볼 낯이 없는데. 안 그래도 아까 전까지 구질구질했는데. 차라리 좀 내가 당당하게 걸어 나와야 했는데. 왜 저렇게까지 앞에 나와서 기다린 거야. 아까 동전 주울 때 눈물을 참은 게 소용없잖아. 나는 그 둘을 보고 걸어가는 그 50m가량의 거리에서 코가 찡해지는 걸 참고 심통이 난 채로 그들 앞에 섰다.
“아웃백 가자.”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우리 가족이 아웃백 같은 데를 가는 건 꿈도 못 꿔봤다. 아웃백에 도착하자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며 메뉴판을 내게 들이밀었다. 부모님은 평소보다도 더 나를 위했다. 테이블 위로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즐비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식탁 위에서 영재 시험장에 제출한 종이들만 떠올렸다. 별말이 없는 나를 보던 아빠는 내게 질문했다.
“어땠어?”
“그냥. 다 못 그렸어.”
“그래도 고생했네. 우리 딸이 이런 데에서 시험을 보러 오고.”
“아니야.”
애써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입으로는 썰린 고기가 들어오고 있었고, 부모님은 자꾸 나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나는 칭찬받을 수 없는 상황인 걸 잘 알기에 그 말을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정말이지 나를 위해 이렇게 비싼 데를 데려와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부모님께 죄송했다. 엄마가 입을 열었다.
“너 미술 해볼래?”
“응?”
“미술 진지하게 해볼 생각 있어?”
“...”
“미술 한다고 하면 학원 다시 다니게 해줄게.”
“안 할래.”
“왜?”
“나보다 그림 잘 그리는 얘들 많아.”
“그래?”
“응.”
머쓱해 보이는 부모님의 표정 뒤로 음식만 욱여넣는 내가 있었다. 몇 번이고 거듭해 제안해도 나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따뜻하고 화목하기만 할 것 같은 이 온화한 레스토랑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무뚝뚝하게 입을 닫고 있었다.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도. 그리고 그 사정을 감내하여 내게 들이부어도 나는 나보다 잘 그리는 아까의 아이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어느 소속의 최고로 이 시험에 뽑혀와서 알게 됐다. 제일가는 얘들을 모아둔 곳에서까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존심 하나로 미술을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우리 가족 모두가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이 아웃백조차 무리하는 한 끼라는 것을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게 내가 처음 꿈을 놓아본 순간이었다.
영재시험 이후로 나는 백지에 무언가 그린다는 것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괴로워하며 그리다가 미완의 결과로 내는 날이 많았다. 점점 그림 실력으로 상을 타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인정하다가도 그들의 그림 앞에 서면 내가 보잘것없이 느껴져 질투했다.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그림도 잘 그리고, 그래픽을 잘 다루니 디자이너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네가 내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닌데 괜히 허파에 바람만 들게 하는 거잖아. 그 말을 듣고 진지하게 그 진로로 간다고 했을 때, 그 돈 다 우리 가족이 감당하는 거 아니야? 너는 그냥 칭찬만 하고 마는 거잖아. 근데 나는 그 말로 흔들린다고. 나는 그런 칭찬 자체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해. 앞으로 나한테 그런 칭찬하지 말아 줘.”
흔들리는 이유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란 걸 몰랐다. 그걸 알기도 전에 나는 그냥 이런 흔들림을 모두 배제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는 미술이란 없다는 걸 중학교 때 확실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