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도 제 짝이 있다더니. 나도 용케 연애를 하고 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연애를 시작한 초창기엔 그간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연락보다 B와 더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몇 개월씩 두문불출할 수 있는 나와 달리, B는 몇 시간만 연락이 되지 않아도 다소 비약적인 걱정을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도 자연스레 B와의 채팅창에다 내 일상과 일정은 물론 순간적으로 스치는 단상들까지 공유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착각을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착각이었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생각이 아닌 은연중에 품고 있던 믿음이라서, 오히려 맹신처럼 깊었다. 어쨌든 '텍스트' 형식의 표현을 하고 있으니 글쓰기 훈련과도 같은 효과를 얻길 기대한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이렇게 써본 적 없던 당시에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글쓰기를 단순히 문자를 적는 행위라 여기다니. 형식보다 내용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건만.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는 어느 작법서의 제목처럼, 글쓰기에는 뼛속까지 솔직해져 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과정이 곧 진정성을 얻는 훈련이고, 그렇게 얻은 자본을 바탕으로 ‘진짜’ 글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에야 이 모든 사실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설령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상대라 할지라도) 말과 글은 공개하기로 예정한 순간 어쩔 수 없이 보이고 싶은 의도가 가미되기에 100% 솔직할 수 없다. 하지만 일기는 오직 나만 본다는 전제 하에 쓰는 글이라서 있는 힘껏 솔직할 수 있고, 적어도 그렇게 하려 더욱 노력할 수 있다.
요즘 '메타 인지'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이제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한 '인지의 인지'를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일기다. 일기장 안에서 자신의 생각, 감정, 인식, 기억 등을 새롭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기를 수 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일기 쓰기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세 번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