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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ing Jan 29. 2024

계획형 인간에서 기록형 인간으로

나도 다루기 어려운 나의 성격 중 하나는 바로 완벽주의다.


요즘은 '완벽주의자' 앞에도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있는데, 나는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과 완벽주의자란 사실 모두를 인정하지만 게으른 완벽주의자란 표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치즈도 먹고 김밥도 먹지만 치즈 김밥은 안 먹는 느낌?)


그러다 최근에 적응적 완벽주의(자)와 부적응적 완벽주의(자)라는 (좀 더 중립적인) 표현을 배웠다. 일생을 완벽주의와 애증 관계 속에서 지내온 터라 듣는 순간 느낌이 딱 왔다. 나는 어느 모로보다 후자 쪽에 속한 사람이었다.


우선 두 부류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부적응적 완벽주의자는 융통성 없이 높은 기준을 고정해 버린다. 그 기준 또한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과도하게 일반화된 높은 기준이다. 이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높아서 실수를 피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로 인해 과제에 대해 긴장하고 불안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의 자기 가치감은 수행 결과에 달려 있기에 실패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기준은 높고 실패는 두렵고 불안도 높다 보니 과제의 시작 시간이 한없이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a.k.a. 게으른 완벽주의자)


이와 반대로 적응적 완벽주의자는 상황에 맞춰 기준을 수정할 줄 안다. 애초에 실천 및 성취가 가능한 선에서 개인의 장점과 단점에 맞춰 높은 기준을 설정한다. 이들은 성공을 강하게 추구하며 일을 제대로 해내는 데 집중한다. 자연스레 여유 있으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가진다. 이들의 자기 가치감은 수행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실패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덕분에 꾸물거리지 않고 시간 맞춰 과제를 시작하고 완수할 수 있다.(비완벽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 有)


어쨌거나 완벽주의와 '높은' 기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모양이다. 나 또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어서 많은 고충을 겪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즐겨 쓰는 '기록'의 종류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작성한 유일한 기록의 형태이자 가장 좋아하는 일이 Plan을 세우는 것이었다.(지금도 문구류 코너에서 '플래너'란 이름이 붙은 상품을 보면 가슴이 뛴다) 나는 새로운 목표나 과제가 주어지면 일단 계획부터 짜는 이른바 파워 J다. 문제는 완벽주의의 자매품인 강박증과 결벽증 탓에, 계획을 세울 때부터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는 점이다. 여러 장 쓰고 버리고 다시 쓰며 겨우 완성한 계획표 또한 너무 이상적이라 결국 현실에서 따라잡지 못하기 일쑤였다.


이제 와서 원인을 분석해 보면,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늘 새로운 변화만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에 기반한 목표를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그 순환 또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실패한 결과만 남고 노력한 과정은 소홀히 여겨 전부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점점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현실에 대한 불만만 늘어나고, 그래서 더욱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분명 매일 힘들게 애를 쓰고 있음에도 성취감을 느껴본 경험이 드문 나날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쩌다 보니) 꾸준히 Log를 기록하는 중이다. 물론 계획도 자주 세우지만,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한 내용 또한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나 자신을 좀 더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모자란 모습도 나의 모습이고 부족한 하루도 나의 하루란 걸 수용하게 됐달까. 그렇게 지금의 나 자신을 지긋이 관찰하면서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울 수 있었고, 노력한 과정도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비로소 차곡차곡 쌓아가는 인생의 내용이 생긴 것이다.


이전에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허송세월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일리 로그를 기록하면서 하루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었고, 의외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셀프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더불어 지난 성과를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늘어난 기억의 수만큼 시간의 가치도 올라간 느낌이다. 요즘은 잠자리에 들어 머릿속으로 하루를 대강 되돌아보면서도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생활 속에 드러난 가장 극적인 변화를 하나 꼽자면, 역시 집을 발칵 뒤집어엎은 정리 축제 사건이었다.


_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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