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춘천 하면 가슴이 뛴다.
드넓은 공지천 호수와 오리배 에티오피아 탑이 있고 그 언덕으롤 오르면 MBC춘천 뒤에 시원한 산책길이 놓여 있고 의암호가 멀리 보이는 어린이 회관이 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종종 그 산책길을 이용했다.
춘천이 내려다 보이고 반대편으로 가면 의암호와 배를 타고 넘어가면 중도가 보이고 소양강물이 굽이굽이 내려와 만나는 곳 내 두 번째 고향 춘천입니다. 겨울바람이 참 매섭고 여름 기온이 한없이 오르는 곳 내 고향 춘천은 분지 형태로 그 주변을 호수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북쪽은 소양강댐이 위치해 있고 그 하류로 흘러 내려온 물이 소양강으로 넘어오면서 그 지류가 북한강으로 합류되니다. 사실 한여름에도 정소양강댐 밑에 물에 담그면 너무 차가워서 발을 뺄 정도이다.
춘천엔 이외수 선생이 있었고 지금은 저 세상에 계시지만 춘천의 명물이셨다. 한여름에도 바바리코트를 입고 공지천에 가끔씩 출몰하셨고 어디서든 소문이 많이 따라다니곤 했다. 생각해 보면 춘천은 너무 작아서 그 당시에는 시내를 걷다 보면 아니 명동을 거닐다 보면 돈 없이도 춘천에서 며칠은 살 수 있어 보이기도 했다.
복학을 하고 그 당시 가끔 난 춘천을 가면 거의 술을 무한정 마시곤 했다. 인사불성은 기본이었고 가끔씩 여러 가지 구설수와 수많은 해프닝이 생기곤 했다. 소주와 맥주 가리지 않았고 1차 닭갈비로 시작해서 시장 안의 총떡과 막걸리 동그랑땡 파전 그 당시 내가 많이 마시던 술의 안주였다. 닭갈비에 가락국수사리 볶음밥은 그 당시 가장 좋은 안주였고 주머니가 매우 가벼운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련한 기억들 너머로 친구의 학교 동아리에 연극 동아리에 있는 아이들을 소개받았었다. 내 친구는 독문과 출신이었는데 사범대 출신의 연극 동아리 후배들을 자연스럽게 소개받았고 난 그 당시 집이 인천이라 춘천에 오면 돌아갈 수 없는 거리였다. 그래서 춘천에 가서 술을 먹는 날이면 으레 만취되었고 자연스레 난 그 애들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 애들 집은 남춘역 주변이었고 수양버들이 있었고 멀리 남춘천역이 보이는 아파트 5~6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앞에는 남춘역 작은 천이 흐르는 것이 보였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밖의 풍경이란 역사와 작은 개천 그리고 수양버들이 한들한들거렸다. 아픈 속을 쓰다듬으며 나는 그 집에서 그애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고 다시 시장으로 나가 정오부터 어제 못다 한 술을 다시금 뱃속에 털어놓곤 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술 하던때였다.
앞에 말 안 한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 집은 자매가 자취하던 집이었다. 혹 **이라는 자매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복학 후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춘천을 내려간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동생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난 그 후배들에 대해서 남다른 감정을 가진 듯하다. 나에게 그 자매를 소개 해주었던 나의 친구는 이 세상에 없다. 내 고등학교 나의 자취시절 나와 추위 배고픔 그 어려운 시절을 같이한 친구고 그 친구는 그 당시 다른 여자친구와 동거를 하던 때였는데 그 친구가 글을 워낙 잘 쓰던 친구라 연극에서 극본을 맡았던 터라 그 자매는 연극 동아리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 자매가 워낙 잘 따르던 내 친구덕에 난 그 애들과 어떤 거리감도 어떤 성별의 차이에도 나를 믿어라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술을 마셨고 그 덕에 어떤 거리감도 없던 터라 수많은 날을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화양연화였던 것 같다. 그 여자애는 술을 많이 먹으면 우는 버릇이 있었고 폭음하는 스타일이었고 우린 참으로 많은 날을 술을 같이 했는데 술을 먹고 후의 그 폭음의 결과를 모두 챙겨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가뜩이나 나도 술을 빨리 먹는 스타일인데 나의 폭음이 일정 부분 치료되었고 나는 그 애 뒤치다꺼리가 나의 의무였다. 사실 마루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한나절 자다가 일어나서 라면을 먹고 숙취를 해소하는 과정이 너무나 자유롭고 아직도 그때 숙취가 한참이던 그 아침에 왜 그리 행복하고 편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감정이었을까? 난 그 아침에 정말 행복했었던 것 같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던 햇살이 그렇게 예브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춘천에 그 4월 아침에 난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하고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때 내가 막 읽었든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아침인 듯했고 이상의 오감도시를 가끔 생각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내 영혼이 한없이 자유로왔고 존레논의 “love is free.”가사처럼 그 역설을 신념처럼 떠받들던 시기였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난 졸업을 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다가 몇 년을 정신없이 지낸 것 같다. 그 자매를 만나보지 못한 채로 2~3년이 지났고 어느 날 대학로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두애중 내가 더 애정을 느쎴던 건 동생이었고 그날 혜화도에서 본 친구는 언니였었다.
바람이 몹시 찬 어느 겨울 어느날 주말에 내 남자친구와 그의 여자친구 그 자매의 언니랑 우린 대학로 술집에서 그동안의 간격을 술로 메우려고 했던지 몇 차를 옮기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불필요한 정도의 직장생활 이야기와 다소 어색해진 사이는 술로 메워졌고 지난날의 춘천의 봄날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훨씬 넘었고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혜화동 후미진 여관 골목에서 친구와 나는 방을 따로 잡고 나는 그 애를 침대에 뉘이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방을 나서서 영등포로 택시를 타고 영등포에서 인천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이 부천쯤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여관에 그 아이를 눕히고 참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애와의 많은 추억들 많은 술자리들 많은 술자리에 해프닝들 그 수많은 일을 생각하면서 그때 왜 그 방을 나와 그 새벽에 대장정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떤 감정들이 뒤섞이고 어떤 생각들로 머리는 많이 아팠는데 나는 문을 닫고 조용히 그 방을 나서는 선택을 했다. 가끔씩 내 욕망이 커졌던 적을 어떤 순수함이 어떤 힘을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소중함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건지 그때의 내 감정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1년도 채 안 돼서 그 여자후배는 성남의 초등학교 선생님 발령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들었고 결혼한다는 이야기에 가을날 그녀의 결혼식 여자친구 들러리로 성남에 전통혼례식장을 찾아갔다. 태어나서 여자애의 결혼 들러리로 가게 되었는데 우린 너무 친한 관계 오누이 정도였기 때문에 참석하게 되었다. 꽤 긴 전통혼례 과정을 마치고 참석한 결혼식 피로연은 우리 때는 왜 이렇게 짖꿏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들의 질투 어린 결혼피로연 문화는 신랑과 신부를 가득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란을 몸속에 넣어 입으로 밀어서 옷 위로 빼내고 먹고 남은 국수를 하나로 합쳐서 그 국수를 신부가 먹게 하거나 신부들러리들 중에서 남자자격으로 참여해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신랑친구일 때와는 다른 구도 다른 느낌을 들게 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우리보다 1살 적었던 터라 나는 존대는 했지만 취기가 오르고 신랑이 말을 터버려 형님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신랑은 약간 깐족거리는 스타일에 말을 막하는 스타일이고 약간 꼬락서니를 부리는 스타일이라 술 먹는 와중에 감정이 상해 언쟁을 하다가 그만 주먹질까지 오가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도 신랑은 들러리 중에서 여자도 많았지만 1살 많은 남자 동아리선배들에 대해 아니꼬왔는지 그 이유로 싸움을 하게 되었고 난 그 과정에서 싸움을 말리고 다시 2차 맥주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아마도 갔어야 했는데 그냥 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2차를 다시 하게 되었고 난 2차 맥주집에서 완존히 맛이 갔고 그 와중에도 한마디를 했고 잘 살아달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신랑 놈한테...
지금 생각해 보면 오지랖도 그러니 그 친구의 입장에서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 우리는 토가 나올 정도로 많이 먹었고 난 처음 기억의 끈을 놓게 된 것이다. 부분 부분 끊어짐에서 그날 한토막이 내 삶에서 버려진 커다란 유실이 있었다. 성남에서 1박을 하고 춘천으로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버스에서 잠도 오지 않았고 하루 종일 멍하게 집으로 내려갔는데도 며칠을 멍하니 지냈다. 그리곤 바로 알게 되었다. 그 **이는 후배도 아니었고 사실 난 혜화동에서 참 많은 고민을 하고 그 여자후배를 재우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오늘 이 후회는 뭔지? 그 아이가 결혼한 후 애가 타고 참 많은 생각들을 해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해 본 기억들이라면 후배라는 가면으로 애써 지내온 그 수많은 나날들이 참 안타깝고 어리석게까지 느껴지기도 해 보인다. 그러다 몇 년 후에 그녀가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 몇 년 후에 내가 가장 절친이었던 친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저 세상을 떠났다. 가끔 살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 "그때 그 후배와의 사랑이 이어졌다면 우린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가끔 그 후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후배는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아이는 몇이나 되는지? 참 궁금하기도 하다. 혜화동에서 다시 함 만나고 싶기도 하고 한번 묻고 싶다. 요즘도 연극을 많이 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얼굴이라도 함 보고 싶어진다. 춘천에 4월 그 따스하던 날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휘날리는 수양버들을 아침에 눈떠 같이 바라보며 듣던 들국화의 "축복합니다."를 함 듣고 싶다. 참으로 순진하고 순수해 보였던 내 젊은 날의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손 한번 못 잡아 보고 어떻게 그런 거리감으로 그런 감정을 평생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지 나의 위대한 위선이 돋아 오르는 오늘이다. 어디서 무얼 하고 어찌 사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위선적이고 아파도 그렇게 애틋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친구도 보고 싶고 그 후배도 보고 싶다. 살면서 그렇게 애틋한 사람과 조우할 수 있다면 그 우연함이 필연이 돼기를 바라며 내 영혼이 자유롭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