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학교에서만 배우나요?(1)
아직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마치 슈퍼맨과도 같은 존재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본 부모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초인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아이에게 세상은 오직 부모로부터 정의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모습은 아이에게 지침이 되고, 그들의 말은 법이자 지식이며 진리가 된다.
아이란 존재는 부모와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처음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삶은 교과서보다 더 깊은 진리를 주며, 경험은 이론보다 앞선다. 아이는 걷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넘어지며 배우고, 실수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통해 점점 더 세상을 확장해 나간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책 보다 먼저 삶을 읽는다. 삶이라는 경험 자체가 곧 이론이 되고, 지식이 되며, 갱신의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배움은 진정으로 시간을 초월한 배움이다. 인간은 태어나 숨을 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숨결을 내쉴 때까지, 모든 순간을 경험을 통해 배워나간다.
그러니 경험이 주는 배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배움 속으로 함께 여정을 떠나보자.
고대부터 경험은 지혜의 근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 없는 지혜는 있을 수 없다”라고 역설하며, 경험을 지식의 재료이자 실천의 나침반이라 여겼다. 경험을 대하는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의 철학 전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하면 우리는 보통 그의 ‘4원 소설’과 『형이상학(Metaphysics)』을 떠올리기 쉽다.
형이상학을 뜻하는 단어 Metaphysics는 ‘Meta’와 ‘Physics’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편집 하고 간행할 때, 《자연학(Physics)》의 뒤(Meta)에 놓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의 자연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이는 것을 곧 자연이라 정의하며, 그것을 연구하는 행위를 ‘자연학’이라 불렀다. 그는 자연학을 통해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는데, 그의 분석 재료는 오직 경험과 관찰이었다.
그는 반복되는 감각과 기억에서 경험이 생겨난다고 보았고, 그 경험 속에서 우연한 단일 사례가 아니라 “대체로 그렇다”는 규칙성을 주목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러한 규칙성은 곧 자연이자 존재이며, 바로 ‘형이상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경험은 단지 ‘지식의 재료’나 ‘정보’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기술의 토대로 보았으며, 대장장이, 농부, 의사처럼 “결과를 만들어내는” 앎은 경험을 바탕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정식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예술(art)’ 혹은 ‘기예(craft)’로 번역되는 ‘technē’, 즉 오늘날의 ‘기술(technic)’이라 불렀다.
또한 그에게 경험은 학문의 원천이자 사유의 중심이었다. 그는 과학적 증명 역시 결국 감각에서 출발해 경험을 축적하고, 그로부터 보편 원리를 도출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저서 《오르가논-Posterior Analytics》에서는 “모든 학문의 시작점은 결국 경험이 제공한다”라고 못 박았다.
다시 말해, 경험이야말로 인간을 ‘배움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경험이 곧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철학적 사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다시 떠올려보자. 환경의 변화는 생명의 생존에 치명적이었고,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자가 조정을 필요로 했다. 그 조정의 결과가 바로 진화였으며, 이때의 환경 변화는 생명체가 겪은 ‘경험’이었다. 다세포 생물의 출현과 더불어 생겨난 신경계는 생명체가 겪은 경험을 더 확장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발달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고도로 정교해진 신경망, 즉 ‘뇌’의 출현이었다.
다시 말해, 자극은 경험이 되었고, 신경계의 시냅스에서 그 경험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기억은 ‘배움’이라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신경계 진화의 산물인 뇌는 애초에 그 진화의 방향 자체가 ‘경험 기반 학습기’로 설계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 말은 곧, 신생아의 뇌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신경계가 분화되기 시작한 태아 단계에서도 뇌간과 제한된 피질 활동을 통해 원초적인 자극을 경험하긴 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의식적인 기억이라기보다는 비의식적 각인에 가깝다.
기억이란 시냅스 수준에서의 반복 자극과 연결 강도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신경가소성의 산물이다. 태아 시기의 인간은 뉴런 수가 출생 직후에 거의 다 정해지지만, 뉴런 간 연결지점인 시냅스는 거의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때문에 태아의 경험은 기억이나 배움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아기가 세상의 빛을 마주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상에 나온 아기의 뇌에서는 시냅스 밀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수많은 감각 자극이 입력되며, 아기의 뇌는 새하얀 도화지에 다양한 색을 채워 넣듯 세상을 그려나간다. 이 과정에서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나고, 반복되는 자극에 관여하는 연결은 강화된다.
이것이 바로 신경가소성이며, 진정한 경험의 시작이다. 그리고 경험하기 시작한 뇌는 놀라운 성장을 반복해 나간다.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언어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나누는 촉감을 정서적 교감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 이름을 기억하고, 긍정적 교감을 나누었던 얼굴을 인식한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이 축적되고 반복되면, 말 못 하던 아이는 말을 배우고, 애착과 감정 표현을 익히며, 소통과 공감을 통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존재로 자라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면, 경험은 곧 배움이며, 뇌라는 껍데기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힘인 셈이다.
경험이 없이는 신경 회로 자체가 구성되지 않기에, 경험 없는 뇌는 유충 없는 번데기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뇌과학적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경험 없는 지혜는 없다’는 진리를 꿰뚫었으니,
그는 단지 철학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학자였음이 분명하다.
경험이 생존의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험이 주는 능력은 무척이나 특별하다.
하지만 유기 생물의 경험이 언제나 성공적인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었다. 진화의 길 위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개체들은 멸종되었고, 자연의 선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돌연변이들이 탈락해 왔다. 그러나 생명체의 진화의 길 안에 그토록 많은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생명체의 진화뿐 아니라, 짧디 짧은 인간의 생에서도 실패의 경험과 그 기억은 무엇보다 값진 결과를 낳는다.
바로 실패의 경험을 통한 또 다른 배움이다.
걸음마를 시작하기 위한 아기의 몸부림은 수많은 실패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 미성숙한 대근육이 자신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 쓰러지고,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균형 감각이 아기의 시도를 좌절시킨다. 하지만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땅을 딛고 두 발로 서는 존재가 된다.
걷기 시작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넘어짐은 균형을 위한 초석이 되고, 엎지르는 일은 근육 조절 능력을 향상한다. 의사소통의 실패를 통해 아이는 언어 능력, 감정 표현 능력, 공감과 사회적 규범을 배우며, 나아가 자율성과 자기 결정의 실패는 '나'라는 존재의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모든 실패는 '변화'라는 배움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 경험은 어떤 가르침보다 값지며, 때로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말처럼, 어쩌면 고통은 변화의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낯선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실패하고, 고통받는다. 그 실패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기억하고, 번데기를 벗고, 알을 깨고, 허물을 벗으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나를 맞이한다.
이 모든 것은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고통조차 아름다운 이유는, 고통이 나를 더욱 강한 존재로 '변화'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
지식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경험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게 하는 장치가 된다. 경험을 통해 배운 지식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삶의 지혜로 승화된다. 그러니 모든 경험은 최고의 스승이 된다.
다시 생각해 보면, 살아 있기에 우리는 경험할 수 있고, 모든 경험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러니 ‘배움’은 생명체가 가진 특권이 되며, “살아 있기에 계속해서 배운다”는 말이 온전히 성립된다.
경험과 기억, 그것을 통한 배움.
그리고 배움을 다시 경험함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순환.
이 위대한 순환은 우리를 더욱 위대한 존재, 더욱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