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인문학이 뭐예요(3)
앞서 우리는 감수성, 독해력, 윤리적 추론력, 역사적 시야 등 인문학이 길러주는 능력들을 살펴보았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이 인류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면, 인문학이 제공하는 능력은 인류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이 인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철학 무용론’을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죽었다. 철학은 현대 과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이론물리학과 우주론에서 철학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을 과학이 훨씬 더 명확하게 설명해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론적 질문들조차 이제는 과학의 몫”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의 정치 평론가 벤 샤피로(Ben Shapiro)와 같은 이는 인문학을 가리켜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 과목은 좌편향된 사상만을 심어줄 뿐이며, 생산성이나 실용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특정 인물의 견해에 그치지 않고, 현대의 기업 중심주의자들과 실리콘밸리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지지받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들의 시선 또한 충분히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실용성과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으며, 인문학이 당장의 문제 해결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능력은 도구가 되지만, 가치는 방향이 되는 법이다.
인간이 인문학의 능력을 잘못 사용하고 있으니 그러한 비판이 따라붙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기에 앞서 인문학을 통해 얻는 능력을 다루었다면, 이제는 ‘왜 그 능력이 중요한가’, ‘그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과 존재의 이유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문학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각 가치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자.
1. 공감 (Empathy)
공감이란 남의 의견이나 감정에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며,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느끼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는 문학이나 역사, 예술을 통해 타인의 삶과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예컨대, 최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는 잔혹한 역사의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비극적인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들과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향해 눈물을 흘린다.
공감이라는 능력의 핵심적인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야기 속 인간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고통을 ‘앎’이 아닌, ‘느낌’과 ‘이해’로 내면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화는 인간을 ‘혼자’가 아닌 존재로 만들어 준다.
공감은 태초의 인류에게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였다. 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인간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타인이 울 때 함께 울고, 아플 때 보듬고, 기쁠 때 기뻐하는 그 능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무리’를 이루었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감은 오늘날 인문학의 배움을 통해 다시 훈련된다.
우리가 문학을 읽고, 역사를 공부하고, 예술을 감상하고, 철학을 사유할 때마다, 우리는 타인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
따라서 공감은 단지 ‘착한 마음’이 아니라, 문명을 만든 전략이자 생존의 기술이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인류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다.
2. 비판 (Critical Thinking)
앞서 소개했던 스티븐 호킹의 인용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그는 “철학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설명하지 못하는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비난이 아닌 비판은 논리적인 ‘사유’와 ‘근거’를 동반한다. 이성 중심의 사유와 근거, 그리고 그에 따른 보편적 결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비판의 틀을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방법은 대화와 반문이 핵심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고, 사람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인간의 무지를 드러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철학의 시작은 늘 “그게 정말 맞는가?”라는 비판적 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비판은 철학의 핵심이자 본질 중 하나다. 비판 없는 철학은 맹목이고, 철학 없는 비판은 비난과 같이 공허해진다.
즉, 철학은 의심을 통해 근거를 재구성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호킹은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한 셈이다.
그는 “철학은 죽었다”라고 철학적 사유를 한 것이다.
‘철학이 죽었다’는 말 자체가 철학이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철학이 인간 사고의 ‘전제’ 임을 역설하는 논리적 지적이며, 비판의 힘 또한 인문학에서 나왔음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비판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과 세계관의 길을 여는 작업이다. 그것은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는 힘이며,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기존의 질서나 권력을 성찰하는 지성이다.
비판 없는 인간의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인류의 삶을 뒤엎었던 이 땅의 모든 개혁 운동은 비판적 사고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쓸모, 곧 그 가치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인문학 없는 인류의 삶엔 ‘혁명’이란 없을 것이다.”
3. 상상 (Imagination)
인문학을 접하다 보면 유독 "상상을 뛰어넘는다",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된다.
그만큼 인문학 안에서는 '상상'이라는 '이미지화'가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상상'이란 현실 너머를 그려보는 창조적 사유이다. 철학과 문학은 인간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유하게 만든다. 이는 경험과 지식, 데이터에 기반하는 분석인 '예측'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예측과 상상은 둘 다 '미래를 향한 사고'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예측은 현실의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데 반해, 상상은 현실과 무관하거나 제한되지 않은 자유로운 발상에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점이라는 점은 같지만, 사고의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된 미래를 향한 사고는 전혀 다른 종착지로 인간의 사유를 옮겨놓는다.
예측은 ‘가능한 미래’를 계산하게 하고, 상상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더 큰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예로부터 완벽한 세상, 즉 이상향을 꿈꿔왔다. 유토피아, 이데아, 발할라, 천국.
이러한 이상향에 대한 상상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인간으로 하여금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러한 동기가 국가와 제도가 되었으며, 문화와 신앙이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상상은 과학적 혁신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화성이 역행하는 이유는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과가 떨어진다면 달도 떨어지는 거지 않을까?”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변하는 건 아닐까?”
이러한 상식을 넘어선 상상들이 과학의 법칙이 되었고, 새로운 상식이 되어왔다.
여러 과학자들의 상상력으로 인해 오늘날의 과학이 이루어졌으니,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데이터를 통한 예측은 현실을 통해 미래를 제한한다.
하지만 상상은 그 경계를 넘어 미래를 확장시키는 사유이다. 그러하니 미래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진다.
상상의 힘에는 해방과 희망, 그리고 창조의 씨앗이 있으니, 우리는 감히 이러한 상상을 담은 인문학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4. 성찰 (Reflection)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문학의 가치는 바로 ‘성찰’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힘인 성찰은 삶의 순간순간에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만든다. 마치 인간의 삶에 방향과 그 이유를 묻듯이 말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
그가 자신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가 '윤리적 성찰'과 '철학의 실천'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말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성찰은 인문학의 모든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찰은 우리로 하여금 '윤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찾게 만든다.
성찰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주며, 자신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나아가 발전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인문학의 가장 큰 쓸모가 여기에 있다.
돌아보게 만드는 힘은 퇴보가 아닌 진보의 전주곡이다. 인류는 돌아봄을 통해 나아가고, 나아진다. 진정으로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배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시장 거리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웠던 이유는 개개인의 성찰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으며, 인류의 진보를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단연 철학에만 성찰이라는 가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찰이란 가치는 모든 인문학에 녹아 있으며,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학이 품고 있는 여타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성찰 또한 지식이 아닌, 느낌이자 삶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문학에서 나 자신과 인간의 삶, 인류를 투영하여 바라본다.
문학을 통해, 역사를 통해, 문화를 통해, 예술을 통해,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깨달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그리고 그 자체로 우리가 배움이 가진 갱신과 변화의 힘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쯤 되면 당신도 느낄 것이다.
인문학의 거울을 통해 당신을 투영하며,
그 성찰이 당신을 배움으로 이끈다는 것을.
가치는 방향을 만든다.
인문학이 가진 가치들은 인간의 삶을 단순히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임을 보여준다.
마치 별자리가 바다 위를 건너는 항해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듯,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밝혀주는 별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별빛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길고 긴 항해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방향 없는 이성과 논리, 즉 인문학이 배제된 배움은 인류라는 건축물을 온전히 완성시킬 수 없다. 하늘로 쌓아야 할 탑을 땅속으로 파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배운다.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고,
그 배움이 갖고 있는 실용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의 목적지를 설정하기 위해,
존재의 삶을 배운다.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 주는, 진짜 배움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