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인문학이 뭐예요?(1)
어린 시절, 나를 소설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 책은 《해리포터》였다.
그 판타지 속 세계에 푹 빠진 나는 온종일 마법의 세계와 온갖 주문들, 그리고 멋들어진 '님부스 2000'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품고 살았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한 권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었다. 어떤 시리즈는 두 권에서, 어떤 건 네 권 이상으로 나뉘어 나왔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손쉽게 책을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손에 쥐고 다음권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을 기웃거리곤 했다.
작은 동네 서점의 문에 달린 종을 "딸랑" 울리며 들어가면, ‘베스트셀러’라는 명찰을 붙인 책들이 마치 케이크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풍경이 떠오른다.
물론 내 발걸음은 늘 해리포터가 나를 향해 손짓하는 코너로 곧장 향했지만, 그 시절에도 수북히 쌓여있는 책들중엔 해리포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엔 예전처럼 한 권의 책이 산처럼 쌓여 있는 광경을 보기 어렵다. 애초에 동네에서 작은 서점을 찾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아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서점의 전통이 있다. 바로 입구에 '베스트셀러' 코너를 두고, 그 순위별로 책들을 진열해 놓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 코너를 지나 마법의 세계로 곧장 향했겠지만, 이제는 그 진열대에 잠시 멈춰서 하나씩 제목을 들여다본다.
그 카테고리를 유심히 살펴보면 시, 에세이, 소설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바로 ‘인문·교양’이라는 이름이다.
내가 한때 밤을 새워 읽던 동화 같은 소설도, 감수성 깊은 소녀가 눈물 흘리며 읽는 시도, 누군가의 일기처럼 담백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도, 모두 결국 ‘인문’이라는 범주에 있다.
역사의 교훈을 찾는 이도, 철학을 통해 삶을 성찰하는 이도,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의 본질을 묻는 이도, 그들이 찾는 책의 어딘가엔 반드시 ‘인문’이 들어 있다.
우리는 아마, ‘인문’이라는 것이 쓰인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그래서, 인문이란 무엇인가요?”
여기도 인문, 저기도 인문.
이쯤 되면 오히려 ‘인문’이란 게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이번엔 그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인문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어떤 배움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가?
‘인문’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류의 문화’를 뜻한다. ‘문화’란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인문은 곧 인간이라는 종이 건설한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동과 상징들, 다시 말해 삶이 반영된 모든 생각의 체계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인문이란 곧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삶을 담은 학문인 인문학의 분야는 인간의 다양성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언어와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 영역, 과학사를 포함한 역사, 철학과 종교 등의 사상까지 아우르며, 세상의 거의 모든 학문과 맞닿아 있다.
(물론 학문적 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모든 분야가 인문학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이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교양 학문은 인문학에 속한다.)
그 수많은 인문학의 갈래들은 인간의 삶이 다양해지고 깊어짐에 따라 함께 진화해왔고, 그 가짓수와 깊이도 점점 더 풍성해졌다.
인문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Humanities’는 '인간다움’, 혹은 ‘고상한 인격’을 의미하는 라틴어 ‘Humanitas’에서 유래되었다. 그 어원 자체가 ‘인간’을 품고 있으며,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단 학문이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도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의 등장과 함께였다.
이토록 이름과 탄생에서부터 ‘인간을 배운다’는 선언을 담고 있는 학문은 인문학 외에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인문학은 “나를 배우는 것은 인간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면할 수 없는 학문으로 우리 앞에 당당히 존재해왔다.
인문학은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과학과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인문학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때때로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의 별을 바라보더라도 두가지의 사고가 다르게 작용한다. 과학과 수학의 사고는 우리의 뇌에 항성의 거리를 구하는 방법과 별의 구성원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에 인문학의 사고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우리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와 그 사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 아마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 문화의 학문인 인문학의 언어를 본능적으로 사랑하는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인문학의 특징은 그 자체가 가진 심미성 이외에도 다양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를 이끈 사유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었다. 인문학이 탐구 방법이 분석적, 비판적, 사변적이라는 특징을 갖게된 것도 철학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철학의 아버지'라 불렸던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겠다.
기원전 5세기경, 당신이 아테네의 시장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마주치게 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반가움을 드러냈을까?
아니면 "저는 당신의 열렬한 팬이에요"라며 그의 저서(사실,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를 내밀고 사인을 요청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보건대, 아마도 당신은 그를 모른 체하거나, 그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을지도 모른다.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소크라테스는 꽤나 기이한 인물이었다.
특정한 직업도 없는 한 사람이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달변가라 해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답변 속에 숨어 있는 개념들을 더욱 깊이 파고들며, 결국 하나의 고백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나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한 장인, 정치인, 시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며 진정한 지식에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문답법(변증법)이라 불리는 이러한 묻고 답하는 방식을 통해 당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지를 일깨우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던 거리의 기피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철학자’, ‘영혼의 산파’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니, 그의 질문은 단지 불편한 것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게 분명해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자각과 사유의 감동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용한 철학적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철학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과 수학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이곳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탈레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Logos)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자연철학자’라고도 불린다.
당시 철학의 주요 관심은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사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세계의 원리’에서 ‘삶의 의미’로 옮겨놓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묻는 데 집중했다면, 그 이후의 철학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에는 실천 중심의 인간 성찰이 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려는 성찰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진정한 배움의 시작을 선언하며,
“선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 없다.”
라는 말과 같이, 진정한 배움이 윤리적 행동의 결과, 즉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말해, 그에게 배움이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윤리적 탐색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창시자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철학 속에 ‘인간’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철학을 인간의 사유와 윤리적 성찰로 전환시킨 소크라테스는, 그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철학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었다.
배움을 통한 인간의 성찰과 변화, 그 가치를 ‘실천적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낸 그의 사유는, 그 자체로 ‘인문학’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철학은 수많은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류의 방향을 제시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인문학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철학을 ‘삶의 태도’이자 ‘정신의 운동’으로 만들어냈으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식과 윤리가 일치된, ‘완성에 가까운 인간’을 꿈꾸다 사라진 별 중의 별이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씨앗으로 삼아 성장한 ‘인문학의 나무’는, 그 열매 안에 같은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비록 그 가지는 역사, 예술, 문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뻗어 나갔지만,
그 가지 끝에 맺힌 열매를 조심스레 쪼개보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심어놓은 그 씨앗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오늘도 조용히 우리에게 속삭인다.
오늘보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인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