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수학이 왜 필요해요?(3)
인간의 뇌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역사에 그 보잘것없는 육체가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가진 감정과 감성은 인간이라는 종을 그 어떤 종보다도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고, 개개인이 자아가 뚜렷한 독립된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공동체를 이룩하게 만들어주었다. 인간은 그 공동체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번영하여 지구를 지배하는 생물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서로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만으로 사피엔스의 왕국을 건설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조작하는 법을 터득하였고, 그 배움은 지구상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
그것은 자연의 언어를 해독하는 능력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이성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수학을 배우는 이유, 그리고 수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번에 펼쳐질 수학의 이야기는 문명에 대한 이야기도, 개인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필요조건이 되어주었던 진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아주 독창적인 세계관 설정이 나온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인류를 사육하기 위해 기계가 만든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 설정이지만, 실제 우리의 자연계도 마치 잘 짜인 거대한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운동량과 에너지는 보존되고, 물질은 특정 조건에서 상태가 변화하며, 생물들은 독창적이면서도 저마다의 규칙성이 보인다. 자연계 안에서 특정한 입력 값은 어김없이 하나의 출력 값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고대 조상들도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정확한 ‘프로그래밍’이자 불변의 법칙을 활용해 불을 피우고, 도구를 사용하며, 규칙적인 우주의 운행을 바탕으로 삶의 양식을 발전시켜 왔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는 물리학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탄도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활용해 무기의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탄도학’이라는 이름 없이도 자연계에 프로그래밍된 탄도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의 탄도학을 한번 상상해 보자.
예거라는 이름의 고인류가 아직 어린 청년들을 모아놓고 그의 돌창을 집어 들었다. 대형 포유류를 효과적으로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연약한 몸으로는 가까운 거리에서 순전히 근력만으로 사냥감의 두터운 가죽을 뚫기는 어려웠다.
예거는 돌창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가까이에서 사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자신의 돌창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예거는 힘차게 도움닫기를 시작했고, 들고 있던 창을 있는 힘껏 멀리 있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창은 고목에 그대로 박혔다. 눈을 반짝이며 그 모습을 본 청년들은 예거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예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 뒤, 청년들에게 돌창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를 한 명씩 지도해 주며 말했다.
“준비 자세는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혀 잡아야 해. 그래야 사냥꾼의 영혼이 창에 깃들지. 사냥꾼의 영혼이 깃들어야만 창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날아갈 수 있단다.
창을 던지는 높이는 내 평소 눈높이와 우리가 어머니 별을 올려다볼 때의 눈높이 중간쯤이 적당해. 그 높이로 던졌을 때 가장 먼 거리까지 창이 날아가게 돼.”
청년들은 예거의 설명을 들으며 힘찬 도움닫기와 함께, 무게중심을 뒤에서 앞으로 전달하며 적당한 각도로 창을 던졌다.
여러 개의 창이 드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예거는 앞으로 부족을 지탱하게 될 청년들을 위해, 그들의 돌창이 발진하고, 궤도를 따라 비행하며, 비행의 최종 목표에 이르는 과정 전반에 필요한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개념에 대한 표현 방식만 달랐을 뿐, 그들은 자연의 법칙 안에서 그들만의 탄도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거의 탄도학은 그 당시 색다르고 재미난 이름으로 구전되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불렀든지 간에,
그들은 이론 없이 과학을 했으며,
숫자 없이 수학을 했다.
그들에게 과학과 수학이란,
자연 그 자체였으며, 생존의 필수 도구였다.
“자연의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거의 모든 법칙은 수학적인 표현으로 기술될 수 있다.
뉴턴의 운동법칙이 발표되기 훨씬 전부터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갈릴레이의 통찰력은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여겼다.
그 시대의 ‘자연의 법칙’은 곧 자연과학 그 자체를 의미했으니, 갈릴레이를 비롯한 당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진리의 탐구자라 칭송받기 위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국 그들은 진리를 신학에서 과학으로 빼앗아 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담은 언어는 성서가 아닌 수학이라고 선언했다.
‘진리’는 시대마다 다르게 정의되어 왔다. 고대 철학에서 진리는 이데아나 본질로서 자연 바깥에 있었으며, 근대 이후에는 진리란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되며, 수학과 경험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현대에 들어서는 진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 언어, 사회적 합의 안에서 형성된다는 비판적 관점이 강해졌다.
하지만 ‘참된 이치’라는 단어 뜻 그대로를 바라보았을 때, 자연의 법칙을 진리라 여겼던 그들의 생각에 큰 오류는 없어 보인다.
자연의 법칙은 머나먼 옛날에도, 어제에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불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의 덧셈과 뺄셈 같은 연산의 법칙이 언제나 동일한 것처럼 말이다.
‘A라는 현상은 B 때문에 나타난다’라는 자연의 모습은 정확한 계산 값을 도출해 내는 수학과 무척 닮아 있다. 아니, 닮음을 넘어서 우리는 실제로 수학을 통해 자연의 모습을 모델링하고,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수학은 자연의 언어이자, 진리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물체의 낙하, 새들의 비행, 아이들의 웃음소리, 생명의 작은 숨결조차도,
정교한 함수와 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야간투시경을 착용하면 적외선 영역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듯, 수학자들의 눈에는 그들만의 ‘수학의 렌즈’를 통해 수학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이 놀라운 사실을 수학자들만이 보고 있었다니, 정말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
수학자가 아닌 우리도 자연이 품고 있는 수학을 간단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천체는 원형(구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물방울이나 비눗방울은 아무리 노력해 봐도 삼각형이나 불규칙한 다각형 모양을 만들기 어렵다.
이는 원(또는 구)이 가지고 있는 수학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원은 모든 점이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위치해 있고, 최소 둘레로 최대 면적을 감싸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액체의 표면장력이나 중력 같은 힘이 가장 균형 있고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형태다.
반면에 벌집이나 거북이의 등껍질, 수정의 결정 등은 육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육각형이라는 도형이 평면에서 틈 없이, 최대 면적을, 최대 효율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선의 형태는 수학적 효율을 넘어, 자연이 담은 예술적 감각을 우리에게 뽐내는 듯하다.
소라, 달팽이의 껍데기,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우주의 은하에 이르기까지 ‘로그 나선(logarithmic spiral)’의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다. 또한 해바라기 씨나 파인애플의 돌기 배열 등은 우리가 ‘황금 비율’이라 일컫는 피보나치 나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재료 대비 면적 비를 줄이고 유체 저항을 최소화하며, 확대해도 모양이 유지돼 성장 과정에서 구조 재배치를 덜 해도 된다는 수학적 특성과 물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을 빼놓고 이 형태를 보아도, 자연이 가진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외에도 어찌 보면 기괴하게 생긴 로마네스코 브로콜리나 바닷속의 해파리, 그리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순한 나뭇잎에서조차,
우리는 그 형태와 균형에서 기하학이라는 수학적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수학의 분야 중 기하학이 가장 먼저 《기하학 원론》이라는 완성된 수학 교과서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수학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삶’이라는 수학을 행해 왔다. 배우고 연구하며 지식을 더한다는 의미에서 수학은 학문의 범주에 속하지만,
인간에게, 아니 이 모든 만물에게 수학은 학문 이상의 것이다.
빅뱅 이후로 시작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코스모스는 수학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세계나 다름없다.
그러니 모든 생명은 그 탄생에서부터 수학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인간이야말로, 그 모든 감각들로부터 전해지는 수학의 기운을 알아채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배우기 시작했기에,
당당히 코스모스의 파편이자 자녀라 자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수학을 배움으로써 문명을 지탱할 지식을 얻으며, 논리와 이해의 힘을 부여받는다.
수학은, 배움이 인간과 문명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하지만 수학은 그 너머를 우리에게 비춘다.
바로 인류의 존재와 우주적 질서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수학이라는 학문은 인류의 역사가 끝이 나더라도 존재할 것이며,
그 배움의 가치는, 우주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영원토록 무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