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인문학이 뭐예요?(2)
학교의 필수 교과목에는 ‘철학’이나 ‘인문학’이라는 과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인문학의 여러 갈래 중 언어, 역사, 사회, 윤리 등이 교과로 채택되고 있다.
왜 우리는 인문학의 시작점과도 같은 철학이나, 인문학이라는 큰 틀을 배우지 않고, 그 작은 분기만을 선택해 배우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국가 교육 제도의 구조적 한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수능의 공통 영역이 국·영·수 및 사회·과학 통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학교 역시 해당 과목들의 시수 확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 같은 과목은 수능에서 선택 과목이 아니므로 ‘입시 효용성’이 낮아, 학교 시간표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또한 교육은 공동체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국가의 정책적 기조는 문해력·수리력·디지털 역량과 같은 핵심 역량 강화를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인문학 같은 학문은 필수과목 목록 밖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학교에서 철학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제도적 구조 탓이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교육적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다.
하지만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종류를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국어, 사회, 윤리, 역사 등 다양한 이름의 가지에 달린 열매를 쪼개보면, 우리는 그 열매가 '인문학'이라는 나무에서 나왔음을, 그리고 그 안에 소크라테스가 심은 '인간의 삶'이라는 씨앗이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문학 교육은 제도적 한계로 인해 축소되었을지언정, 인문학에 대한 가르침과 그 중요성을 뿌리째 뽑지는 못한 것이다.
효용성만 따지자면, 수학이나 과학처럼 논리와 이성의 학문이 인류의 기술 발전과 삶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 인류는 그토록 인문학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이미 인간인 우리가 ‘인간의 삶’을 배우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걸까?
위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국어는 대표적인 인문학의 갈래이자, 인문학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국어를 배움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단순히 말하기, 듣기, 쓰기에 머물지 않는다.
국어라는 교과목 안에는 언어학, 해석학, 문학 등이 녹아 있으며, 이 학문들은 우리에게 ‘해석적 독해력’과 ‘공감적 상상력’, 그리고 언어 안에 숨겨진 ‘미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우리가 수학을 배우며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듯, 국어 역시 사유의 구조를 정련하는 훈련장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편의 시를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이육사, 『광야』 中
위 예시는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는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우리는 시의 한 구절 속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은 의식을 상상의 현장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우리는 간접적 체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체험은 공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시적 표현 안에서 단어들의 배열은 마치 춤추는 무용수처럼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언어의 박동, 상상을 통한 이미지, 그리고 감정의 공감은 그 표현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심미적 경험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우리의 뇌는 단어들의 퍼즐을 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독해력’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다.
또한 이 능력을 얻게 된 인간은 스스로 '서사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경험, 집단의 기억, 혹은 타자의 이야기를 이야기 구조로 엮어내며, 새로운 문장과 서사를 만들어 간다.
그 이야기들은 전파되고 공유되며, 결국 인간의 삶의 의미를 다시 구성하게 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동물들과 달리,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해석하고, 다시 응용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이 능력은 배움을 통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며, 우리를 더욱 ‘인간’ 답게 만들어 준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단지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언어의 창조, 해석, 응용을 통해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윤리와 도덕은 옳고 그름, 행복, 책임, 공존과 같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물음을 다룬다. 인간의 삶을 향한 과목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가장 인문학에 가까운 교과라 할 수 있겠다.
윤리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윤리와 도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유의 층위를 담고 있다.
윤리 속에 숨겨진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대화와 설득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의견을 명료하게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입장을 경청하고 조율하는 힘은 바로 철학의 핵심적인 대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윤리를 배우며 키우게 되는 이러한 ‘대화적 설득력’은, 합의를 도출하고 공존을 가능케 하는, 인류의 존속을 위한 아주 소중한 도구이자 능력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대화, 토론, 윤리적 합의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때로 인간에게 삶의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자유’나 ‘평등’과 같은 가치를 ‘억압’이나 ‘파괴’와 같은 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치 판단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옳은 일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인문학은 정답을 요구하는 암기 과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답이 아닌 ‘탐구’에 있다.
그러므로 윤리와 도덕 안에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확정 짓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의 사유 능력을 제약하게 된다.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배움으로써 ‘옳고 그름’을 넘어, ‘어떻게 해야 모두에게 더 나은가’를 고민하는 윤리적 추론력을 길러야만 한다. 그래야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도 다층적으로 판단하고, 균형 잡힌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윤리적 추론력'이 제대로 형성되어야만,
우리는 인류 문명을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 윤리적 추론의 힘은 나아가 다른 문화, 종교, 가치관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 즉 ‘문화 간 통섭력’으로 이어진다. 이 통섭력은 오늘날처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기도 하다.
또한 윤리와 도덕을 통해 향상된 추론 능력은 우리가 사회라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게 만들고, 그 안에서 문제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그리고 이 통찰은 공공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은 태도로 이어지며, 단순한 비판이 아닌 참여로 향하는 의식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결론적으로, 윤리와 도덕은 인간을 ‘공존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만들어준다.
인류 역사상 인간은 단 한 번도 홀로 생존해 온 적이 없다. 그러니 이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두 번, 세 번 역설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단일 개체를 넘어, ‘인류’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잇고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리와 도덕은 인간을 인류로 만들어주는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박은식, 『한국통사』 中
위 인용문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임시대통령이었던 박은식의 역사에 대한 견해이다. 이 선언문에는 "역사만 잊지 않으면 망한 나라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박은식 선생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역사란 시간의 흐름과 그 연속성 위에 새겨진 인간의 삶이자, 존재의 기록과도 같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성장일기가 '역사'라는 기다란 두루마리 위에 빼곡히 적혀 나간다.
기록과 글에는 연속성이 있다. 서론이 있다면 본론과 결론이 있기 마련이고, '기승'이 있다면 '전결'이 따라오는 것이 글이 가진 연속성이다. 그러하니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두루마리에서 시작된 존재의 기록은 새롭게 쓰이는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닌, 커다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소설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따라서 박은식 선생은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국가'라는 형태가 사라져도 '정신'이라는 본질은 소멸되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정신이란 한 민족의 시작부터 이어져 온, 인과가 끊기지 않는 한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장편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역사이고 인문이다.
역사란 과거로부터 이어진 기록의 연속이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가 엮여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지난날을 성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은 우리에게 '역사적 시야'를 가지게 만든다. 현재의 삶을 과거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변화의 흐름을 읽는 힘,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란 역사 속의 인과가 만들어낸 현재의 상태이자 결론이며, 그 형태가 경제, 정치, 제도, 문화 등으로 표출된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결론은 단순히 인과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지, 역사의 완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회의 모습은 분화되고 달라지며 진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흐름이 만들어낸 모습이지,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정리해 볼 수 있다.
과거라는 역사의 흐름에서, 현재라는 사회를 분석하면, 미래라는 설계를 그려볼 수 있다. 이 설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 설계 도면 안에 '인류의 삶'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태어나, 사회라는 제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하니 역사와 사회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고 구조를 읽을 때, 더 나은 내일을 설계할 권능과 책임이 생긴다.
결론적으로 역사와 사회라는 교과목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문을 넓혀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인간의 삶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라."
이렇듯 인문학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이라는 배움을 통해 다양한 능력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나아가 더 나은 인간을 향한 발돋움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꼭 교과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문학이 주는 '인간'에 대한 배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한다.
그 배움이 주는 깨달음은 수학이나 과학보다 꽤나 직관적인 교훈을 주기에, 이러한 학문을 자기 계발을 위한 교양서적으로 많이 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인문학에서 인간을 느낀다. 인간다움이 묻어있는 학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느낀다.
그러니 인간이 어찌 인문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