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경험

3-3. 학교에서만 배우나요?(2)

by 더블윤

경험은 지식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배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여정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바로 ‘인간관계’에 대한 배움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공동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공동체 안의 삶,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장 어려워하는 종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뚜렷한 자아는 때로는 서로 간의 소통과 공감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협동이 생존을 결정짓는 종이지만, 개체마다 뇌와 감정, 기억이 달라 예측 불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한 언어, 문화, 가치관, 트라우마 등이 층층이 얽혀 있어, 수학 공식처럼 정답을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러하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인간관계란 것은 한 번의 실수가 곧 관계 손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험이나 재시도조차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유리는 금이 가버리면 돌이킬 수 없기에, 관계란 것은 언제나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예측 불가성과 정답의 부재, 그리고 관계 실험에 대한 부담감은 결국 개인의 인간관계를 향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인간관계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모습까지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쉽게 가지지 못한다.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도덕이나 윤리 과목은 공동체 질서를 위한 규범이나 제도를 가르쳐주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것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물론 사회심리학, 관계과학, 커뮤니케이션학 등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지침서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학문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접해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란, 세상의 모든 학문 중에서 ‘경험’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인간은, 그들이 선택한 진화의 방향으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양육 의존기’가 매우 긴 존재이다.

인간은 두뇌 용량의 폭발적 확대와 직립 보행에 따른 골반 축소로 인해, 다른 동물들보다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의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이는 아이가 부모 또는 양육 보조자에게 더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된다.

이를 ‘다행’이라 표현한 이유는, 아이의 미성숙이 곧 뇌의 미성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뇌는 다른 동물들의 이미 완성된 뇌보다 훨씬 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신생아의 뇌 무게는 성인의 약 25% 수준에 불과하며, 이후 신경 발달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다. 이러한 느린 뇌 성숙은 환경 변화에 맞추어 뇌가 장기적으로 적응하고 조정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바로 자극과 경험에 의한 뇌의 가소성이 아이의 뇌가 가진 잠재력을 점진적으로 개방해 주는 것이다.

뇌(신경)의 가소성을 통해 아이가 먼저 발달시켜 나가는 영역은 감각과 운동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인간 또한 생존에 필수적인 영역부터 먼저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이 시기는 대략 생후 6개월까지에 걸쳐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하지만 생후 6개월 된 아이의 뇌 용적은 성인 뇌의 절반, 즉 약 50%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간의 뇌 가소성은 20대까지도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의 뇌는 여전히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사회성 발달, 즉 인간관계에 대한 배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협동, 언어, 규범, 문화 전승에 깊이 의존하는 생물종이다. 이 복잡한 ‘사회 알고리즘’을 학습하려면, 거듭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그리고 피드백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인이 된 우리에겐 도전적이고 어려운 일이지만, 아이는 부모, 보호자, 또래로부터 이러한 사회 알고리즘을 안정적으로 시뮬레이션하며 학습할 수 있다.

즉, 아이는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실패하거나 망가질 걱정 없이, 인간관계의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유아기의 아이가 가족 단위의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인간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배움과는 달리, 인간관계는 실패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특수성이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자라나는 아이에게 사회성을 기를 수 있는 실험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양육자와 함께 웃고, 눈을 맞추며, 세상을 ‘함께’ 바라보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가 경험하는 양육의 기억은, 뇌가 ‘함께 살아가기’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며, 경험을 통해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틀을 배우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아이의 인간관계는 양육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관계 실험을 마친 아이는, 이제 더 넓은 사회 속에서 새로운 테스트를 거쳐야만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 과정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는 아이들이 그동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워온 인간관계를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있는 아주 적합한 장소다.

그러나 가족의 품을 벗어난 아이는 이곳에서 곧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각기 다른 울타리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어온 세상은 제각각이었고,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관도 모두 다르다. 어떤 아이는 공감적 수용이 몸에 배어 있고, 어떤 아이는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자기주장이 강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닌 아이들이 한 공간에 어우러지며,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는 때로 마찰과 갈등을 야기하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패의 경험은 때로 가장 훌륭한 배움의 기회가 된다. 이 원리는 인간관계의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인간관계의 알고리즘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도 그들은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겪는 혼란이나 상처를 어른들의 도움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그렇게 도움과 성찰을 거쳐 다시 쓰인 아이들의 ‘사회적 알고리즘’은 마찰과 갈등의 구조를 점차 공감과 협력의 구조로 전환해 나간다.

이렇듯 실패의 경험을 통해 재구축된 인간관계에 대한 지식은, 해마다 갱신되며 더욱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는 곧, 더 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든든한 준비가 되어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인간의 경험은 언제나 '사회의 장(場)' 안에서 쓰여진다.

로빈슨 크루소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처럼, 홀로 생존에 성공했던 인물들도 결국 자신이 속했던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진정으로 혼자 설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경험이 사회의 장 안에서 쓰여진다는 말은, 곧 우리의 대부분의 경험이 ‘사회 속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며, 이는 인간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위한 배움의 기회는 일생 동안 충분히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는 여전히 크나큰 숙제이며, 풀기 어려운 난제, 또는 넘기 두려운 높은 장벽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모두 각기 다른 사회적 지문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80억에 가까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면, 80억 개의 서로 다른 공식을 알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는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향을 나누려 하기도 하고, MBTI와 같은 성격 유형 분류를 통해 그 공식의 수를 줄여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일까. 현대인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타인을 배제한 채 자기 자신만을 세상의 중심에 두기도 한다.

이러한 선택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또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울, 고립, 이기심, 편견 등 현대사회의 수많은 정신적 부작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인간은 인간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문제의 해결 방안 역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자, 그 기억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양육자의 품속,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그 안전한 울타리를 말이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체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있다. 그러나 확실한 지지자와 보호자가 있었던 가족 안에서는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인간관계의 기초를 자연스럽게 배워나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울타리의 범위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가족을 넘어 더 큰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지지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동체 안에서는 이미 성숙한,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울타리 안에서의 배움은 갈등의 승리나 마찰의 회피가 아니라, 공존과 화합, 이해와 용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에 상처를 주지 않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통은 기존의 나를 뛰어넘게 하는 소중한 재료가 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인격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까지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관계 속에서의 실수나 실패로 인해, 삶 전체가 흔들릴 만큼 큰 상처를 입는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 사람이 관계를 회복할 용기를 내길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인간관계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경험만으로 부족하다면, 간접경험을 통해 배움을 확장할 수 있다. 도덕, 윤리, 심리학 등의 교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다룬 수많은 자기 계발서, 이야기와 문학 속 인물들의 서사 또한 우리의 배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간접경험을 기억하고, 배우고자 하며, 내면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인간관계라는 이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조금씩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터득한 우리는 한 명의 진정한 어른이 되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인간관계의 문제풀이 방식을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지식을 넘어 삶의 지혜가 된다.
그리고 그 삶의 지혜는 가장 어렵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이 인간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인문학이 되었고, 그 배움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번엔 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경험한다.

우린 그 경험을 통해 사회 안에, 공동체 안에, 우리 안에,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배운다.
그 배움을 우리는 '인간관계'라 불렀으며, 그 배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경험은 모든 배움의 초석이 될 수밖에 없다.
경험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경험 없는 지혜란 있을 수 없으며,
경험 없는 삶도 없으니,

경험이란 것은 모든 것을 담은 배움이며, 배움의 존재가 가진 심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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