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의 세계속의 나
나의 근원을 찾기 위한 질문을 던져보자.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의 근원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우주에 관심이 많다.
내가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천체관측부 활동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내가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인과의 흐름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보자.
내가 천체관측부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친구의 권유였다.
나는 왜 그 친구의 말을 따랐을까?
그 이유는 거절을 잘 못하고,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내 성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어릴 적 교육과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격과 성향을 형성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대중교육이라 할 수 있다.
대중교육, 즉 공교육은 민주시민의 자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민주시민의 자질이 중요해진 이유는, 국민국가의 탄생 이후 시민의 역량이 곧 국가의 경쟁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계몽주의적 사고의 확산을 통해 이루어졌다.
계몽주의의 확산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인문주의의 회복과 고대 그리스 철학의 부활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초기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상 활동이 있었기에 번영할 수 있었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는 인간만이 가진 인지 능력, 즉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이 상상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크고 복잡한 두뇌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두뇌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발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사물을 움켜쥘 수 있는 손 덕분에 신체보다 두뇌를 더 진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원의 두뇌 발달은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습성과 관련이 깊다.
초기 포유류는 천적을 피하기 위해 숲 속의 나무 위 생활을 택했고, 이것이 곧 유인원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포유류가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공룡 대멸종 이후 거대 초식동물의 부재와 온난해진 기후로 인해 지구상에 대규모 숲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공룡의 대멸종은 소행성 충돌로 인해 일어났다.
소행성의 충돌은 천체의 궤도 운동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천체의 궤도 운동은 중력과 관성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가능했다.
우주를 구성하는 힘과 에너지는 우주의 탄생과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주의 탄생은 빅뱅으로 시작되었다.
이 인과관계를 극단적으로 축약해 말하자면,
내가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빅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因果)’란 원인과 결과를 의미한다.
즉, A라는 사건이 B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고, 함수로 표현하면,
f(A) = B
위와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우주가 정의역과 공역이 명확히 존재하는 하나의 함수로 쓰인 세계라면,
A와 B는 필연적으로 연결된, 일종의 운명적 관계라 할 수 있다.
헌데 실제로 자연계는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세계, 즉 수학의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와도 같다.
이 세계의 수많은 현상들은 수학적 함수로 기술되고, 계산되며, 예측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빅뱅 이후 시작된 엔트로피의 흐름 속에서 내가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일 역시 정교한 함수로 계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내가 우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필연이자 운명으로 발생한 일인 것이다.
나는 운명적으로 이 우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결정론적 우주관’이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를 둘러싼 자연계의 거의 모든 현상은 거의 오차 없이 계산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물질과 입자의 집합체인 우리의 의식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미래조차 수식으로 표현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 계산식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우리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은 결국 우주의 탄생 순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과 같다.
이 우주의 모든 사건이, 우주가 시작된 그 순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끝없는 인과의 사슬 속,
그 기나긴 사슬의 한 조각을 담당하는 작은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이 논리에는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불변의 진리로 여겨온 ‘열역학 제2법칙’,
즉 “고립계에서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는 명제 속에도 사실 100퍼센트의 사실이 담겨 있지는 않다.
실제로 엔트로피가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일이 발생할 확률이 극도로 낮을 뿐이다.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 선언이 아니라 확률적 명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립계 안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다.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사건은 마치 1000개의 동전을 던졌을 때 모두 앞면이 나오는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0은 아니다.
인간인 우리가 수천 번, 수만 번 동전을 던져도
모든 동전이 같은 면을 보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만, 우주는 그 행위를 사실상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존재다.
우주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그 극도로 낮은 확률조차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다.
실제로 양자 터널링(quantum tunneling) 같은 현상은 그와 같은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여기서 커다란 변수를 맞이한다.
우주는 정의역과 공역이 완벽히 일대일 대응하는 함수의 집합체가 아니라, 분산과 표준편차가 극히 작은 정규분포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 가파른 정규분포의 세상 속에서도 때로는 가능성의 벽을 뚫고 등장하는 예외적 현상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은, 그 정교한 함수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이 세상은 결코 단정할 수 없다.
인과의 사슬은 여전히 끝없이 이어져 있고, 필연과 운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사슬은 때로 전혀 다른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한다.
불확실한 내일은 여전히 우리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어놓고, 우리는 그 길 앞에서 선택이라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세상인가.
그리고 우주란 얼마나 매혹적인 존재인가.
이 함수와 확률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우주의 탄생이 내가 우주를 좋아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하다.
나는, 이러한 우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