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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국군

by 더블윤
(이미지 출처 : 국방일보)


울타리


핏발이 서려있는 붉은 언덕 위에

이름 없는 묘목(墓木) 이 있으니

이 것이 당신의 묘비냐 묻는다


스스로 말뚝이 되어 경계를 이루고

서로를 엮어 지키고자 하였으니

그 고귀함을 기려야 함이 마땅하나


알아주는 이 티끌과 같고

그 삶에 보답 따윈 사치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새로운 말뚝이 일어나

생의 이름에 인(人, 仁)을 담으니


풍파란 말뚝의 조건이라 여기며

맞는 돌 침묵으로 버텨내기에

돌무덤을 이루어도 후회는 없으리라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나 또한 무명용사로 남으련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현재의 제 직업은 군인입니다.

그리고 10월 1일인 오늘은 '국군의 날'이지요.


흔히들 국군의 날을 국군 창설일로 아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군의 날은 1950년 10월 1일, 6·25 전쟁 중 국군 제3보병사단 23 연대 3대대 10중대가 처음으로 삼팔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된 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담긴 기념일입니다.


저는 2020년, 화살머리고지와 백마고지에서 진행된 유해발굴작전에 지뢰 및 폭발물 제거 임무로 파견된 적이 있습니다. 그 깎아지는 듯한 고지에서 수많은 유해와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 탄약들을 직접 마주했었죠. 그중에서도 작은 호 안에서 서로 뒤엉킨 채 웅크리고 있던 두 구의 시신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십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저는 감식단이 아니었기에 그 유해가 어느 편의 군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 또한 살아 숨 쉬던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제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선배 전우들의 피와 땀 위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제가 하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더해줍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안중근 장군께서 남기신 이 말은, 항상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궈줍니다.


군복을 입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는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찰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이어 만든 울타리입니다. 그 단단한 울타리가 있기에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계속해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이름보다는 단단한 울타리로서 서있고자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 없는 울타리로, 묘비 하나 없는 무덤으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총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들이 우리 가족과 이 땅을 덮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쩌면 저는 매일 군복을 꺼내 입으면서도, 언젠가 군복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옆에 있는 전우들도 저와 같은 마음 품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군복을 벗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함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하여 경계에 서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한민국을 지키는 방패, 보이지 않는 울타리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에게도 이름이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 응원과 격려가 있든 없든, 묵묵히 이 땅을 지키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오늘 하루만, 단 하루만큼만,

이 이름 없는 울타리들이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감히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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