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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섹스어필

by 더블윤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창작하고 남기는 행위일 것이다. (공룡의 사체가 석유로 남겨진 것은 예외로 두자.) 우리가 고대인의 생활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인간.

하얀 캔버스 위에 형상을 그려내고, 매끈한 대리석으로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며, 공기 분자의 진동을 악보로 기록하고, 빈 종이 위에 글을 남기는 행위.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창작을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은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우리의 삶에 다양성과 색다른 자극을 선사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음악이 없다면 삶은 실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유토피아》로 유명한 토머스 모어는 “예술은 인생의 혼을 표현하는 창이다.”라고 말했다.
꼭 이러한 명사들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예술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술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밀접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인류의 상상력은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고, 더 나아가 찬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어, 수풀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림을 단순한 청각적 자극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천적이나 작은 먹잇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상상은 곧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발전했고, 직접 보지 못한 상황까지 그려내며 “저번에 저 언덕 너머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지금쯤이면 열매가 맺혀 있을 거야.”라는 식의 정보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종교와 신화의 탄생으로 직결되었고, 이는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며 문명의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오늘날의 인류는 고대 인류의 상상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상상의 결과물인 예술은, 앞서 말한 생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일과 열매의 위치나 포식자가 숨어 있는 것을 상상하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미적 감수성 ― 예술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각과 감정은, 과연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왜 우리는 예술적 감수성을 유전자 속에 새겨 두고 있는 것일까?

흔히 예술은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미적 감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계에서 “아름답다, 예쁘다”라고 인식하는 대상은 인간이나 그들이 만든 예술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공작새의 꼬리에서 힌트를 얻어, 예술적 감각과 적응력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

수컷 공작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화려한 색상과 웅장한 꼬리를 보다 보면, 누구라도 ‘멋지다, 아름답다, 예쁘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감상은 암컷 공작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암컷은 더욱 화려하고 빛나는 꼬리를 가진 수컷을 선호하며, 이는 곧 짝짓기 기회로 이어진다.
결국 화려하고 아름다운 수컷일수록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생존은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것에만 의미가 있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생존은 진화의 관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은 결국 ‘생의 유지’를 넘어 ‘유전자의 보존과 확산’에 귀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곧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실제로 수컷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꼬리 때문에 암컷보다 생존 확률이 낮지만, 수많은 암컷과 짝짓기 하여 유전자를 퍼뜨린다.
그리고 그 전략은 긴 진화의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공작이 존재하게 한 요인이 되었으니, 꽤나 성공적인 전략이 된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윈은 이러한 자신의 통찰을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이라는 책에 담아 남겼다. 공작새의 꼬리를 통해 미적 감각이 생존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포착한 그의 통찰은 지금도 놀라울 따름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에게 타고난 미적 감각이 없다면, 그들의 화려한 외모와 짝짓기를 할 때 정성을 들여 만드는 아름답고 창의적인 구조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방법이 있긴 있다. 다시 공작의 꼬리로 되돌아가 보자 인간은 수컷 공작의 꼬리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암컷 공작은 거기에서 중요한 유전 정보를 포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가 강인함과 건강의 상징이라면, 그런 수컷과 짝짓기를 낳은 새끼는 아버지를 닮아 튼튼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이 그렇듯이 암컷 공작은 수컷보다 새끼를 낳을 수 있는 횟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건강한 수컷(외모가 화려한 수컷)을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물론 화려한 외모를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많은 자원이 소모되지만, 후손을 더 많이 낳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손실은 감수할 만하다. 수컷의 화려한 꼬리털이 강인함과 활력의 상징이라면 그런 수컷과 짝짓기를 한 암컷 은 건강한 후손(또는 건강한 수컷을 선호하는 후손)을 낳을 것이고, 이들은 강한 생존력을 바탕으로 유전자를 닐리 퍼뜨려서 '공작 세계의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다.
성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외모는 배우자의 우월한 적응력을 입증하는 일종의 자격증인 셈이다.

-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8장 본능과 창조력 중


다윈이 주장한 ‘성선택’에 대해, 예술적 감수성―즉 미적 감각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라는 반론도 존재했다.
위 내용은 그 반론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한 브라이언 그린의 저서 《엔드 오브 타임》의 일부다.

암컷 공작이 수컷의 화려함에 단순히 매혹되었든, 아니면 그들의 꼬리에 숨겨진 유전적 암호를 읽어냈든, 수컷 공작의 꼬리가 수행한 역할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섹스어필'이다.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사실은, 동물들 역시 자신의 파트너를 신중하게 고르고 선택한다는 점이다.
각 동물은 저마다의 섹스어필을 통해 짝짓기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은 시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어필하며 후대를 남겨왔다. 때로는 강인한 육체를 통해, 때로는 식량이나 재물을 과시함으로써, 때로는 몸에 치장을 하고 채색을 하여 자신이 짝짓기에 적합한 상대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모두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곧 ‘유전자를 남기려는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에게 남아 있는 미적 감수성이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파트너를 고르는 안목’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술작품뿐 아니라 파트너에게서도 그 숨겨진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사실 “미적 감각이 생존에 직결된다”라는 주장은 다소 논리적 비약일 수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이 상대방의 섹스어필을 인식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은, 쉽게 부정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이 미적 감각을 예술 창작에 활용한다. 예술의 기원, 인간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단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미적 감각이 생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그것을 사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내가 예술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본능인 섹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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