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

을 느끼다.

by 더블윤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명이 있는 물체를 뜻하는 생물(生物)의 사전적 정의는,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해 나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 현상이란 영양, 운동, 생장, 증식을 의미한다. 즉, 먹고 움직이며, 유전자를 지녀 번식할 수 있는 유기체를 생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체들 중에서도 유산균이나 대장균 같은 세균은 생물로 분류되지만, 홍역이나 인플루엔자 같은 바이러스는 무생물로 본다. 바이러스 역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숙주 세포 없이는 어떠한 생활 현상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단순히 유전자를 담은 단백질 입자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어린 시절 생물학 시간, 나를 충격에 빠뜨린 존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였다.
생물 시간에 배웠던 ‘무생물’인 바이러스, 잠시만 그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자.




박테리오파지는 박테리아를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다. 몸체는 머리·꼬리·다리로 나뉘며, 외형만 보아도 단순한 입자라 보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테리오파지의 머리 안에는 DNA가 빽빽하게 감겨 있고, 꼬리에는 유전물질을 주입하기 위한 주삿바늘 같은 관이 들어 있다. 미세하게 뻗어 있는 다리는 곤충의 다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박테리오파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여준다면, 달착륙선이나 외계 문명의 소형 우주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도 그랬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장면은 이 작은 존재가 숙주 세균에 접근할 때 펼쳐진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 표면의 단백질 수용체를 정확히 인식한다. 접점을 찾는 순간, 다리가 세균 표면을 단단히 붙잡고, 곧이어 꼬리 부분이 수축하며 숙주 안으로 자신의 DNA를 주입한다. 그러고 나면 DNA를 운반하던 단백질 캡시드는 버려진 우주선처럼 말 그대로 껍데기만 남게 된다.
DNA가 세균 내부로 들어가면, 세균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세균의 리보솜, 효소, ATP, 단백질 합성 기구는 모두 바이러스를 복제하는 공장처럼 동원된다. 세균이 가진 분자 기계들은 박테리오파지의 설계도, 즉 DNA에 따라 새로운 바이러스 입자를 조립하기 시작한다.
머리, 꼬리, 수축관, 꼬리섬유가 각각 따로 만들어지고, 마지막에 정확한 순서로 결합된다. 그 정밀함은 마치 누군가 조립 매뉴얼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전정보와 분자 상호작용만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숙주 세균은 빠르게 붕괴되고, 세포막이 파열되며 수십에서 수백 개의 새로운 파지가 한꺼번에 방출된다.

무생물로 분류되는 바이러스의 작용이라 보기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큼 극적이다.


자국의 비밀병기인 소형 우주선을 타고 적국의 생산시설에 잠입한 주인공. 그는 자동화된 생산 시스템의 프로그램을 변형해 자신이 타고 온 우주선의 부품을 무수히 생산하게 하고, 이를 조립해 대량의 우주선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새로운 우주선들을 이용해 적군의 생산시설을 파괴하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자, 이 모습이 박테리오파지의 이야기이다. 무생물이라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인 박테리오파지의 구조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는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유전자 기계’, 혹은 ‘생존 기계’라는 개념이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진화, 즉 다윈의 자연선택의 주체가 각 종의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자기 복제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관점에서 각 종의 개체는 유전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바로, 개체는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과 복제를 위해 이용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인 우리는 46개의 염색체가 존속하기 위해 머물고 있는 하나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이 궁금한 분들이라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이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의 사례를 떠올려 보면, 이 주장이 훨씬 분명하게 이해된다.
박테리오파지의 유전물질은 분명한 유전 정보를 복제하는 유전자이며, 그 유전물질이 탑승하는 박테리오파지의 몸체는 아무리 보아도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에 가까워 보인다.

유전자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이러한 ‘생존 기계’에 탑승한다. 그리고 생존 기계의 역할은,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해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낼 때까지 그 유전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나아가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 기계를 유지하고 정비한다. 먹고, 마시고, 잠을 자며, 각종 욕구를 충족하도록 유도하면서 말이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존재는, 우리의 뇌가 아니라 조용히 잠자고 있는 유전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 다시 한번 생물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생물이란, 간단히 말해 영양, 운동, 생장, 증식을 수행하는 유기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논리에 따르면, 영양·운동·생장은 결국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 기계를 유지·보수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식은, 유전자가 자기 자신을 복제함으로써 완성된다.
결국 생물의 생활 현상이란, 유전자의 생존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도킨스의 관점은 생명을 정의하기보다,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렌즈에 가깝기 때문에 이를 오해해선 안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정확한 생물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정의를 찾고자 한다 해도, 그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짐작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의식을 가진 존재만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대사를 할 수 있는 존재만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박테리오파지의 사례에서 보듯, 단 한 가닥의 유전 정보를 지닌 입자조차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 내재된 무엇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결국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생존 활동을, 우리가 ‘살아 있음’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살아 있음을 가장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낀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지금 내 시야에 담긴 사랑하는 이의 삶을 느낀다.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씨앗이 지닌 놀라운 생명의 힘을 느끼고, 반려동물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살아 있기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낀다.
밤하늘의 별과 흐르는 천체의 운행 속에서 묘한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이 모든 것을 이루었을지도 모를 초월적인 존재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무생물에 가까운 작은 바이러스 입자에게서조차 그들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리고 당신이란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생명의 흔적을 감지하고, 그러한 감각들은 다시금 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생(生)’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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