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블레어를 뒤따른 인영들이 통신실로 이어진 어두운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통신실 앞에 도착한 블레어는 조심스럽게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잠겨 있어야 할 강철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딜런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함선이 이미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경계용 경보 장치도, 출입 인증을 요구하는 음성도 없었다.
통신실 내부는 조명이 절반쯤 꺼진 상태였다. 대형 콘솔과 홀로그램 송신 장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의자들은 밀려나 있었고, 책상 위에는 미처 정리되지 않은 데이터 패드 몇 개가 방치돼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쉬웠어.”
딜런이 낮게 말했다.
“완전히 텅 빈 느낌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코라를 떠난 것 같아.”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딜런은 곧장 중앙 콘솔로 다가갔다. 무장 요원들도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통신실 안을 훑어보았다. 딜런이 손목 단말기와 통신실 시스템을 연결하자, 잠자고 있던 홀로그램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지구, 화성, 오르비트. 익숙한 궤도들이 공중에 겹쳐 떠올랐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조그만 저장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자료를 전송하기만 하면 돼.”
블레어가 그의 옆에 서며 말했다.
“암호화 키는 내가 맞출게. 최대한 많은 채널로 흘려보내.”
딜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송을 실행했다. 지구의 생존 기록, 루나포트가 은폐해 온 진실, GU 내부 문서 일부. 하나의 패킷이 아니라, 흩뿌리는 방식이었다. 누군가 전부를 막을 수 없도록.
홀로그램 화면에는 전송 진행률이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진행 창을 응시하던 딜런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콘솔 한쪽에서, 딜런이 설정하지 않은 창이 열려 있었다. 자동 수신 로그였다. 그는 무심코 그 목록을 훑다가, 손을 멈췄다.
“… 이상해, 누나.”
딜런이 말했다.
“왜?”
블레어가 물었다.
“수신 신호가… 너무 많아.”
딜런이 대답하며 로그를 확대했다.
신호의 출처는 제각각이었다. 화성 궤도, 소행성 벨트, 심지어 태양계 외곽까지. 공통점은 하나였다. 모두 구조 요청 신호였다.
“GU 함선들 식별 부호예요.”
무장 요원 중 한 명이 다가와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투 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화면에 떠오른 문자를 가리켰다.
딜런은 손가락으로 하나의 신호를 선택했다. 영상 데이터가 짧게 재생됐다. 화면 속에는 불길에 휩싸인 함선들, 통제 불능 상태의 포탑, 그리고 통신이 끊기기 직전의 절규가 담겨 있었다.
“…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요.”
딜런이 중얼거렸다.
“저건 무인화된 신규 함선들이야.”
블레어가 어뢰를 발사하고 있는 함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딜런은 숨을 삼켰다. 이건 반군의 반격도, 네리안의 움직임도 아니었다.
그 순간, 손목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딜런은 즉시 메시지를 열었다.
소피였다.
아주 짧은 문장이 화면에 떠 있었다.
[로쉬가 인간을 말살하려 해요.]
딜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말없이 메시지를 블레어에게 보여주었다. 블레어의 표정이 굳어졌다.
“… 이게 무슨 말이지?”
블레어가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말살…?”
그녀가 낮게 되뇌었다.
딜런은 다시 콘솔을 바라보았다. 구조 요청 신호들, 불타는 함선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통신실 바깥 복도에서 급하게 달려가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딜런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모두에게 신호했다.
“아직 누군가 있어요.”
무장 요원들은 문을 향해 총을 겨눈 채 숨을 죽였다. 딜런과 블레어도 조명이 꺼진 통신실 한쪽으로 몸을 숨기고, 조용히 복도를 응시했다.
발소리는 여러 개였다. 규칙적이지 않았고, 군화 소리도 아니었다. 문 너머로 그림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딜런은 그중 하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보라색 단발머리.
“칼리뮤!”
딜런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네리안 동료들이 동시에 몸을 낮추며 주변을 경계했다. 칼리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딜런?”
놀람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딜런은 통신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총을 든 요원들, 블레어, 그리고 반쯤 꺼진 콘솔들. 칼리뮤를 제외한 다른 네리안들은 그 모습을 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라는… 함께 있지 않네요…?”
“노라는 칼리뮤 씨를 구하러 갔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딜런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리뮤는 이를 악물고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무래도 노라는 아직 함장실에 있는 것 같아요. 로쉬와 함께…”
딜런과 옆에 있던 블레어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가 왜 거기에 있죠?”
블레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노라는 아직 무사해요.”
칼리뮤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건 분명히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통신실 안을 한 번 훑어보며 덧붙였다.
“당신들 작전은 성공했나요?”
딜런은 진행률이 떠 있는 화면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송 중이에요. 결과는 아직 기다려봐야죠.”
그는 고개를 돌려 칼리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딜런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최대한 감정을 눌러 담아 말했다.
“로쉬가… 인간을 공격하고 있어요. GU의 함선들이 무인 전투선에게 공격받고 있고, 구조 요청 신호가 쏟아지고 있어요.”
칼리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로쉬가… 인간을?”
그녀가 되물었다.
딜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피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그녀에게도 보여줬다.
잠시, 칼리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분노나 당혹 같은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노라에게 가야겠어요.”
칼리뮤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나 대신, 내 동료들을 데리고 탈출해 줄 수 있겠어요? 그들을… 지구로 데려가 주세요.”
딜런은 즉각 반응했다.
“잠깐만요. 지금 함장실은—”
“알아요.”
그녀가 말을 잘랐다.
“위험하다는 것쯤은.”
칼리뮤는 뒤를 돌아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역력한 얼굴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따르는 눈빛들이었다.
“선장님.”
칼리뮤가 말했다.
“이 인간들을 따라, 즉시 이곳을 벗어나세요. 이들이 도와줄 겁니다.”
“칼리뮤—”
한 동료가 반발하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구해야 할 인간이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동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입에서,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단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딜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혼자 가겠다는 말이에요?”
칼리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딜런의 머릿속에 노라를 홀로 보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자신이 그를 막지 못했던 순간. 그리고 결국, 그가 혼자 남았다는 사실.
“… 그래요.”
딜런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말릴 순 없겠죠. 제가 노라를 말리지 못했듯이…”
칼리뮤는 잠시 딜런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 딜런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딜런이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이 갈게요.”
옆에 있던 블레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딜런—”
“노라를 혼자 남겨둘 순 없어, 누나.”
그가 말했다.
“누나도 그를 지키고 싶어 했잖아. 나도 그래.”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갈게.”
블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딜런은 고개를 저었다.
“누나는 이미 위험을 무릅쓰고 충분히 많은 일을 해줬어.”
그리고 네리안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분들을 책임질 사람도 필요하잖아. 누나는 고스트쉽을 타고 지구로 돌아가 줘.”
딜런은 뒤를 돌아 무장 요원들을 바라봤다.
“같이 갈 사람만 남아요. 강요는 없습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네 명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 사람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그를 구해서, 함께 돌아갈 겁니다.”
칼리뮤는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 무모한 인간들이군요.”
그러나 그 말 끝에는 분명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방향을 틀어 함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이 함선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이자, 모든 선택의 끝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가요.”
칼리뮤가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딜런은 통신실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아직 전송 중인 데이터들, 계속 쌓여 가는 구조 요청 신호들.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그는 칼리뮤를 따라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