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3-5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구절은 창조의 전 단계로서,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신의 창조 질서가 시작됨을 상징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손길에 의해 ‘카오스(Chaos)’는 비로소 ‘코스모스(Cosmos)’로 변모한다. 이 이야기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우주가 절묘한 질서의 집합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물리학적 사실로 본다면, 엄밀히 말해 이 우주는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잠시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내려놓고 이 우주를 바라보자. 인간의 짧은 생애와 그 좁은 인식의 틀 안에서, 이 우주를 무질서하다고 인식할 일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태초의 우주는 그 존재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빛도, 어둠도, 심지어 혼돈과 질서조차 그 존재가 정의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어떤 존재가 무한하고 무궁하며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존재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했고, 별의 심장에서는 새로운 물질들이 만들어졌으며, 중력의 소용돌이는 천체들을 빚어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은 아무도 관찰하지 않는 무대 위에서 펼쳐진, 무음의 연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약 45억 년 전, 태양계가 형성되며 우주의 작은 미아가 될 뻔한 암석 조각들이 원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작은 미행성에 불과했던 지구는, 탈출하려는 대기를 붙잡을 힘도, 태양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에너지를 견딜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충돌과 병합을 거치며, 지구는 말 그대로 ‘성장’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거대한 충돌들을 견뎌내며, 지구는 점차 놀라운 가능성의 행성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생명의 씨앗을 품어냈다. 이는 지구의 성장통이 선사한 놀라운 결실이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양해졌다. 태초의 한 빛이 팽창해 가는 우주 속에서 수많은 별이 되어간 것처럼, 생명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처럼 그 수를 늘려 갔다.
태초의 지구는 요란하고 뜨거웠던 성장기와는 달리, 생명이 싹트기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한 시기를 맞이했다. 더 이상 용암의 바다로 가득한 행성이 아니었고, 쏟아져 내리는 자외선과 유독한 공기가 지배하는 행성도 아니었다. 몇 차례의 대멸종이 지구를 덮친 적은 있었으나, 생명을 품게 된 지구는 마치 아이를 품기 시작한 어머니처럼, 그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이 품은 생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구는 어찌 보면 공허한 행성이었다. 그 행성을 품고 있는 광막한 우주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에는 의미라는 것이 없었다. 높이 솟아 있는 광활한 산맥도, 넘실거리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낸 깊은 바다도,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 역시,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해 줄 존재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먼 원시의 밤, 나무에서 내려온 한 보잘것없는 생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별빛이 깃들었고, 그 순간 처음으로 코스모스는 누군가에 의해 ‘관측’되었다. 어쩌면 코스모스는 그 찬란한 탄생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명은 자신의 눈 안에 담긴 감동을 소리 높여 외쳤을지도 모른다. 저곳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그 순간, 처음으로 존재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 생명이 스스로를 인식했을 때, 우주는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 이후 산맥의 높은 곳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대신 대화와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바다에는 나무들이 ‘배’라는 형태로 가공되어 떠다니기 시작했고, 별들에게는 이름이 생겨났다.
지구 곳곳에 발자취를 남기게 된 이 종의 이름은 호모 사피엔스, 인간, 바로 우리들이다.
적어도 현시점까지 우주에 알려진 유일한 지적 생명체인 우리는, 끝없는 우주의 의미 없는 무언극에 마침내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으며, 질서의 집합체와도 같은 이 세계에 비로소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지구의 시간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은 하나의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생물의 종은 다양했지만, 이토록 지구에 거대한 변화를 야기한 생물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작은 분명 보잘것없었다. 나무에서 내려온 유인원은 생존해야 했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해야만 했다. 짐승들은 발톱을 날카롭게 벼리고 송곳니를 발달시키며 사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새들은 창공에서의 삶을 위해 커다란 날개를 펼쳤고, 어떤 종은 더 크거나 더 작은 몸집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에 적응해 갔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려 단단한 대지와 하나가 되어 초록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뇌를 선택했다. 그 유인원들은 커진 뇌 용량을 활용해 호모속(homo, 인간속)으로 진화했고, 그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유별났다.
약 7만~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호모 사피엔스가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점. 그 이전에도 호모속의 다른 고인류들도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했지만, 이 시점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분명히 다른 정신적 작용을 시작했다.
이전의 호모속은 주로 실용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상징과 문법, 추상어를 사용하는 언어를 발전시켰다. 이 언어는 단순히 “먹이가 있다”가 아니라, “저기 있는 큰 동굴 뒤의 바위 밑에, 지난주처럼 토끼 무리가 모여들 가능성이 있다”와 같은 미래 예측과 기억 공유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곧 협력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소수의 혈연 집단을 넘어, 100~150명 규모의 집단 조직이 가능해졌고, 신뢰와 역할 분담, 전술적 사냥, 공동 육아와 같은 복잡한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정신적인 작용의 질적 도약을 ‘인지혁명’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인지혁명의 진정한 핵심은 실용적 언어가 아닌 ‘허구와 상상’에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을 ‘허구를 믿는 생명체’이자 문명의 창조자로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허구를 말하는 능력을 통해 신화, 종교, 부족 정체성, 조상 숭배와 같은 집단적 믿음으로 서로를 묶었다. 이는 수십 명이 아닌 수백, 수천 명 규모의 ‘가상의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힘으로 이어졌다.
상상을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으로 ‘내일’을 생각하는 능력, 즉 계획성을 획득했다. 다른 호모속을 포함한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면, 인지혁명 이후의 호모 사피엔스는 예측과 대비, 구조화된 노동을 통해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혁명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를 넘어, 환경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존재로 나아갔다. 수렵채집 사회 속에서 정치, 예술, 종교, 과학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기억·기록·계승·발전이라는 문명의 기초 요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처음 던진 순간, 바로 그 지점이 인지혁명의 결과였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혁명은 생물학적 사건이자, 존재론적 전환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순간부터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의식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에 새긴 것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세계, 코스모스였다.
그들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며 거대한 짐승의 척추를 상상하거나, 여신의 젖가슴에서 흘러나온 모유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늘 같은 자리에 떠 있는 별들을 기준으로 밤하늘에 그림을 그렸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했다. 자연계의 생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상상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순간부터 자연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우주의 일부로만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인지혁명은 언어의 진화, 사회적 협력, 상징과 허구의 창조, 시간과 미래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인간을 생물학적 동물에서 문명을 만드는 존재로 전환시켰다. 같은 상상과 같은 상징을 공유하며 거대해진 공동체는 수렵·채집 생활에 점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공동체가 커진 만큼, 끊임없는 이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이 위협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연을 활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곧 자원이 되었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얻은 하늘의 질서는 그들을 밭으로 이끌었고, 그곳에 씨를 뿌리게 만들었다. 밭에 뿌린 씨앗은 이윽고 더 위대한 무언가의 씨앗이 되었다.
자연의 조화 속에서 질서의 감각을, 시간의 흐름을, 우주의 율동을 읽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작은 생명. 그 생명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이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기 자신 외의 ‘무언가’를 잉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이 잉태한 무언가가 바로 문명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하늘을 바라보았을까?
허기를 달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 음식이 있는 것도, 포식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고, 별을 세며, 이름을 붙이고, 궤도를 계산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나아가 그 너머를 꿈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머나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 역시 오늘날 우리가 믿고 꿈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생각이나 상상을 하며 밤하늘의 찬란함을 바라보았는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문명의 시작은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의 결속은 그들이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동일한 상상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코스모스를 관측하며 얻은 지혜는 절기와 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또한 코스모스의 존재는 그들에게 질서와 조화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결국 문명은 도구나 농업, 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인간은 코스모스 속에서 패턴을 읽고, 질서를 발견하며, 시간 속에서 의미를 붙잡으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천문학의 시작이었고, 종교의 시작이었으며, 예술의 기원이 되었고, 찬란한 문명을 떠받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인간은 왜 생존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되었을까?
왜 언어를 만들고, 수를 세고, 돌을 쌓아 별에 닿으려 했을까?
혹여 코스모스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침묵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을 마주하기 위해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수학을 만들고, 법을 만들었다. 모든 문명의 기저에는 ‘영원하지 않음’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형식’이 바로 문명이었다.
그러니 문명은 코스모스에 대한 반응이었고, 우주를 향한 염원이었다. 우리는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려 했고, 그 질서를 따라 삶을 설계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만들었고,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을,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을 만들었다. 다르게 말하면, 문명은 인간이 코스모스를 이해하고자 했던 하나의 언어였으며, 코스모스는 인간이 문명을 만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초적 질문이었다.
인간은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 위대한 질문이야말로 모든 학문과 문명의 시작이었으며, 인류 진화의 가장 위대한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시작된 순간, 인간과 문명은 찬란한 코스모스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것은 인류가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는, 코스모스를 향한 항해의 돛을 올리는 순간이었다.